단어 뜻을 물어보는 건가? 그렇다면 "사전을 찾아보거나 자습서를 보고 이해를 먼저 해 보렴."
나는 어렴풋이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수행평가라고 하니 정확한 의미가 전달되지 않을까 봐 선뜻 알는 체를 하지 않았다. 초등 때 나오는 단어들은 대부분 쉽게 설명할 수 있었는데, 중학교 사회과목의 추상적인 개념어는 나에게도 어렵게 느껴진다. 30여 년 전 나의 사회책에도저런 단어가 나왔었던가. 문득 나 역시 정확한 개념이 궁금해져서 관심을 가지고 아들의 설명을 들어보았다. 귀속지위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가지는 지위이고, 성취 지위는 개인의 의지나 노력에 따라 후천적으로 가지는 지위라고 한다.
"아들은 귀속 지위래요. 그럼 엄마는 귀속 지위일까요? 성취 지위일까요?"
아이가 퀴즈를 내었다. 나는 단번에 엄마도 귀속 지위라고 했다. 나도 처음부터 엄마가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으니까. 어쩌다가 엄마가 되었으니까.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분명히 밝혀둔다. 정답은 "엄마는 성취 지위이다."
사회 수행평가 1번 문제는 '사회화의 개념을 정리하고 자신이 사회화된 경험을 서술하시오.'이다. 나는 아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 경험이 무엇인지 듣고 싶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아이가 말했다.
"초등학생 때 친구들이랑 전략이 필요한 보드게임을 했는데, 내가 알고 있던 규칙과 달라서 아이들이 뭐라고 했었어요. 그 일 이후에 그 보드게임 규칙을 알게 되었어요. "
나는 갸우뚱했다. 아들은 사회화의 의미를단순히 규칙을 알고 변화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참고로 아들의 말은 여러 번 물어보아야지만 말하려고 하는 전후 맥락을 겨우 알 수 있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있었던 일인지, 적어도 세 번 이상은 물어봐야 한다. 순간 아들이 상처를 받지는 않았나 걱정되었지만, 상처가 될 정도의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엄마의 마음으로 접근하면 사고를 흐리게 되어 말의 중심에서 멀어진다. 아들의 결론은 의외로 단순하다. 여전히 단순해서 초등학생 같아 보이는 중학생 아들이초등 시기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어려운 개념어에 작게나마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가정, 학교, 학원에서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깨닫고 있음을 아들의 흔들리는 눈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보통의 중학교 1학년 남학생의 성장하는 모습이다.
난 학년의 구분처럼 성장도 확실하게 구분이 될 것이라고 늘 착각하는 엄마이다. 신생아 시기에 큰 사이즈의 기저귀를 미리 사놓는 바람에 아이에게 다 쓰지도 못하고 처분하지 않았던가. 유아기에서 아동기로 넘어가면서도숱하게 시행착오를 겪었다. 여전히 사춘기 아들에게 처음인 엄마는 또한 착각을 반복한다. 그러나 최소한 인간적인 실수는 안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것도 모르냐?'라는 무시와 비난이 섞인 말을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요즘 엄마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혼자서 해결해 내려는 아들에게 섭섭한 참이었는데 마침 내가 나설 자리가 생겼다. 아들의 어릴 적 기억을 상기시켜 주기로 했다.
"너 초등학교 1학년때 아파트 놀이터에서 또래인지 형아인지로 보이는 아이들이랑 놀고 싶어서 장난을 걸었다가 그 아이들이 너에게 화를 내며 '너 뭐야, 너 저리 가'라고 했던 거 기억나?"
아들은 처음 보는 낯선 아이라도 친구가 되어 함께 뛰어놀 수 있는 자연인이었다.
"응? 그런 적이 있었어요?"
"엄마랑 한 때 그 일로 대화도 나눴었는데, 이제 기억이 안 나나 보네~ 그때 네가 조금 속상해하길래 엄마가 말했었지. 잘 모르는 친구랑 놀고 싶은데 무턱대고 장난부터 걸면 상대방은 네가 놀이를 방해하고 괴롭히러 온 걸로 생각해서 불편해질 수 있어. 그러면 오해가 생기잖아. 그러니까 같이 놀고 싶은 마음을 상대방이 알아챌 수 있게 신호를 줘야 해. 행동이 먼저가 아니라 말로 "얘들아, 나도 놀고 싶은데 나랑 같이 놀래?" 하고 말이야. 허락을 구하라는 게 아니야. 상대가 당황하지 않게 화장실에 노크하고 들어가듯이 말로 신호를 주는 거야. 그 일 이후부터 네가 친구들에게 오해받는 일이 줄었었잖아, 엄마는 그때의 경험으로 네가 한 단계 사회화가 되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
"오~ 생각해 보니 그런 거 같아요."
오랜만에 아들과 언성 높이지 않고 대화 다운 대화를 한 것 같다. 사실 이번에도 내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수행평가지에 서술하고 평가받는 것은 아이 몫이니 이제 아이에게 맡긴다. 아들이 엄마가 그런 것도 기억하냐고 신기해했다. 엄마가 아들의 성장기간 동안 함께 고민했었던 생각까지 세세히 기억하고 있음을 알아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것이 엄마가 아들을 사랑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