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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Feb 29. 2024

학부모상담 = 부모의 불안을 다루는 시간

부모는 누구나 불안하다.

 개인을 특정할 수 없도록 일부 내용을 변경하였으며,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학부모 상담 시즌이 되면 프로폴리스 캔디 한통 정도는 거뜬히 먹는다. 말을 많이 해서 목소리가 갈라진다든가 목이 까슬거린다든가 할 때를 대비한 나름의 노하우인 셈이다. 우리 반은 28명 중 26명이 상담을 신청했다. 저학년의 경우는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상담을 신청한다. 이쯤 되 오히려 상담을 신청하지 않은 2명이 눈에 뜨일 정도다.


나는 전화상담보다는 대면상담을 선호한다. 사람이 직접 만났을 때라야 나눌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면상담에서는 전화상담에서는 불가능한 눈맞춤이 있다. 물론 나도 상담주간이 힘들다. 수업 후 2~3시간 상담을 일주일 내내 하려면 진이 다 빠진다. 하지만 대면해서 만나는 이 얼마간의 상담 시간은 그 위력이 상당하다. 이 상담은 1년간 불쑥불쑥 올라오는 학부모의 불안을 잠재워 줄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누구나 불안하다. 잘하는 아이는 잘해서 불안, 못하는 아이는 못해서 불안이다. 같은 연령대의 아이를 가진 부모들을 연달아 상담하다 보면 신기할 때가 종종 있다. 키가 작은 아이네 집은 키 작다고 놀림받을까 걱정하고, 키가 큰 아이네 집은 키만 크지 여물지 못해서 치일까봐 걱정한다. 친구가 없으면 없어서 걱정, 친구가 많으면 또 이런저런 말썽이 생길까 봐 걱정. 같은 문제로 정반대의 고민을 하는 부모들을 심심치 않게 만난다. 그럴 때면 부모가 된 이상 어느 정도의 불안은 필연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서준이네 엄마는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분이다. 그녀는 상담 테이블에 앉아 인사를 나누자마자 곧바로 메모지를 꺼냈다. 상담시간에 물어볼 것들을 적어온 체크리스트라고 한다. 서준이네 엄마는 대여섯 가지 궁금한 것들을 차례차례 물어보다. 질문들은 매우 단순했다. 그래서인지 답변은 빨리 끝났고 서준이네 엄마는 상담시간이 아직 10분이나 남았는데도 더 이상 궁금한 것은 없다며 자리를 떠났다. 대개 학부모들은 정해진 상담시간을 넘기더라도 더 상담을 했으면 했지 덜 하고 싶어 하진 않는다. '내 아이'라는 주제는 해도 해도 흥미로운 대화주제가 아니겠는가. 그래서인지 서준이네 엄마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출처 : adobe stock)


이후로 이어진 몇몇 상담을 통해 서준이네 엄마가 동네 엄마들로부터 평판이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학부모들은 나에게 정보를 주겠다는 호의(!)로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서준이네 엄마가 자기 아이를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한다고, 놀이터에 한 번도 애를 풀어놓지도 않고 동네 엄마들하고 인사도 안 한다고. 아주 XXX 없는 사람이라는 그런 이야기였다. 정말 그럴까? 직접 만난 서준이 엄마는 따뜻하진 않더라도 상식적인 사람 같아 보였는데.




서준이는 몸이 약하다. 그래서 사시사철 목에 거즈손수건을 두르고 다닌다. 물론 한여름도 예외는 아니다. 서준이는 첫 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전에 대수술을 받았다. 때문에 격렬한 운동은 삼가해야하며 이런저런 조심할 음식들이 있었다.


송아지 같은 큰 눈망울을 가진 서준이는 아주 성실하고 착한 아이였다. 하지만 수업 내용을 빨리 이해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 서준이는 매일 예습을 해왔다. 집에서 공부할 교과서 한 세트를 따로 준비해 매일 엄마와 예습을 하고, 그 부분을 뜯어서 학교에 가지고 온다. 그래서 서준이의 교과서엔 정답이 적힌 예습 종이가 끼워져 있다. 학교에서 안 풀고 집에서 미리 풀어오는 건 반칙이라고 뾰로통한 아이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서준이처럼 집에서 매일 교과서 예습을 하겠다는 아이는 없었다.


빠르지 않은 아이를 수업시간에 뒤처지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 매일 예습을 시키는 서준이 엄마. 나는 서준이 엄마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날 일이 벌어졌다. 국어시간에 우리는 글을 읽고 글의 내용을 새롭게 각색해보는 활동을 했다. 정답이 따로 없는 활동이라 아이들은 저마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용을 구상하고 있었다. 물론 오늘도 서준이의 국어책엔 미리 예습한 종이가 끼워져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서준이와 같은 모둠의 준영이가 나를 부른다.


준영 : "선생님! 서준이 책에 정답 써있어요."

나 : "준영아, 서준이는 매일 예습해 오잖아."

준영 : "아닌데... 서준이가 한 거 아닌데..."


나는 서준이 자리로 가보았다. 서준이의 국어책에 끼워진 오늘의 예습 페이지는 과연 서준이의 글씨가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어른의 필체였다. 서준이가 큰 눈을 굴리며 어쩔 줄 모른다. 쉬는 시간서준이를 따로 불러서 이야기를 나눴다. 녀석도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눈도 못 마주치고 개미만한 목소리로 읊조린다. 어제는 할아버지 제사가 있어서 시골에 다녀오느라 예습할 시간이 없었단다. 그래서 급한 대로 엄마가 대신 적어줬다는 고백 아닌 고백을 녀석으로부터 들었다.


(출처 : pixabay)


이 날 이후 서준이는 예습 종이 꺼내기를 주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끄러워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예습 종이를 꺼내지 않고 싶은데 그걸 보지 않고는 정답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아이는 힘들어하고 있었다.


나는 서준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러저러한 그간의 이야기를 전하고는, 아이가 더디더라도 좀 틀리더라도 자기 답을 적을 수 있도록 지켜봐 주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서준이는 이미 엄마와 예습을 한다기보다는 정답을 베껴온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1학년 때처럼 계속 매일 예습을 하기에는 무리인 시점이 온 것 같다고, 아이가 스스로 해결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나의 말은 다행히도 받아들여졌다. 서준이 엄마는 그러면 학교수업은 서준이가 스스로 하도록 하고 본인은 복습을 시키겠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서준이는 더 이상 예습 종이 같은 건 학교에 가지고 오지 않는다. 예습종이의 힘을 빌리지 않는 지금은 푸는 문제의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다. 그래도 서준이는 어딘가 행복해 보인다. 개미만했던 목소리 꽤 커졌다. 송아지눈으로 배시시 웃기만 하던 서준이가 이제는 반 애들에게 잔소리도 한다. 친구들이 복도에서 뛴다든가 새치기를 한다든가 하면 큰 소리도 낼 줄 안다.


2학기 상담 시즌. 서준이에 대해 함께 고민한 바가 있어서일까. 서준이 엄마가 괜스레 반갑다. 이런 걸 내적 친밀감이라고 하는 걸까. 서준이 엄마는 이번에는 아무 쪽지도 꺼내지 않았다. 오늘은 체크리스트가 없냐는 나의 말에 서준이 엄마는 미소를 짓는다. 서준이 엄마는 이번에는 주로 내 말을 듣기만 했다. 서준이가 성장한 만큼 서준의 엄마의 불안도 그만큼 사라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여느 엄마처럼 아이 이야기로 상담시간을 꽉 채우고는 돌아갔다.

(출처 : pixabay)


서준이 엄마를 생각한다. 몸이 약한 아이가 또래에게 치이는 걸 보기 힘들어서 친구들과 어울리게 둘 수 없었던 서준이 엄마를. 수업 내용을 잘 따라가지 못해 교실에서 허둥댈까 봐 매일 예습을 시키던 서준이 엄마를. 체크리스트에 적어온 것만 간단히 묻고는 급히 상담을 마쳤던 서준이 엄마를 떠올렸다. 그녀는 어쩌면 아이 이야기로 더 이상 상처받기 싫어서, 선생님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 전에 여러 질문들로 나의 입을 막으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아이가 성장하는 만큼 엄마의 불안도 줄어든다. 먹이고 입히는 영역에서야 확실히 부모가 아이를 양육하겠지만 내면의 성장에서만큼은 꼭 그렇지 않다. 어떨 때는 아이가 부모를 성장시키기도 한다. 예습종이가 필요 없어진 서준이와 상담 체크리스트가 필요 없어진 서준이 엄마는 많이 닮았다. 


많이 닮은 그 둘은 매우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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