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남동생도 많고, 여동생도 많다.
어느 경우엔 나보다 더 연상처럼 보이는 깊게 주름 잡힌 남자의 입에서
“누나”라는 말이 나올 때면 어쩐지 민망한 마음이 먼저 든다.
페이스북 활동을 활발히 하던 시절에도 내 댓글에는 유난히 '누님'과 '언니'라는 호칭이 많았다.
나는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주인공도 아니고,
밥을 척척 사주는 멋진 누나도 아닌데 그들은 왜 그렇게 편하게 나를 누나라 부를까.
그들의 입장은 모르겠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누나’라는 호칭은 싫지 않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자동으로 마음을 쓰게 된다.
내 친 남동생을 대하듯 괜히 한 번 더 챙기고 괜히 한 번 더 걱정하게 된다.
물론, 누나가 애인이 되는 일 같은 건 내 나름의 기준을 단단히 세워두면서.
여동생이 없었던 나는 어릴 적 여섯 명의 언니들 사이에서
여동생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포대기를 달라고 졸라 시골 밭에서 캐놓은 통통한 조선무를 등에 업고
“애기야, 애기야” 하며 달랬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걸까.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날, 엄마는 시장바구니 속에서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예쁜 여자 인형을 꺼내 주셨다.
그 인형을 받아 들던 순간의 기쁨을 아직도 기억한다.
초저녁 잠이 많던 내가 한겨울 차가운 이불속에 먼저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
어느 언니인지, 슬그머니 다가와 나를 밀어내곤 했다. 내가 갓 덥혀 놓은 온기 위로 언니는 몸을 뉘었고,
나는 다시 차가운 옆자리에서 몸을 더 작게 말아야 했다.
그 얄미운 온기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형제서열 여덟 번째. 집안의 끝자락.
인터폰도 없던 시절, 나는 단골 문지기였고
각종 심부름은 늘 내 담당이었다.
형제 많은 집 막내들의 응석받이는 내게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유일하게 내 손을 잡고 심부름을 가던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그 동생은 나에게 "은영아 ~" 라며 친구 취급했다. 아마도 그 애에겐 난 더없이 친근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서열에 밀려 화투판 근처에도 못 가던 우리 둘이 몰래 화투장을 만지작거리던 기억.
동전 백 원을 주고 장난처럼 건네받은 그 소중한 “누나”라는 이름.
내 나이 열다섯,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누군가의 ‘누나’로 불렸다.
어쩌면 나는 그 ‘누나’라는 소리에 기분 좋은 결핍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갈증 때문일까. 나는 아직도 누군가에게 지시하거나 부리는 일이 영 서툴다.
“이거 좀 해줘”라는 말 대신 차라리 내가 먼저 움직인다.
시킨다기보다 내가 해버리는 쪽이 익숙하다.
누나라는 말이 싫지 않은 이유도 그때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나와 언니는 누군가의 머리 위에 서는 자리가 아니다.
누나와 언니는
먼저 살펴주는 자리이고
먼저 움직이는 자리이고
먼저 덮어주는 자리다.
어쩌면 나는 평생 누나, 언니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막내에 가까운 자리에서 자랐지만 마음만은 늘 위쪽에 두고 살았다.
누군가의 감정을 먼저 살피고
누군가의 허기를 먼저 채우고
누군가의 실수를 먼저 덮어주면서.
그래서 나는 아직도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일이 서툴다.
부탁 대신 움직임을 택하고 요구 대신 침묵을 택한다.
누나는 그런 자리니까.
그래도 가끔은
나를 기대어도 되는 사람으로,
돌봄의 대상이 아닌 돌봄을 받는 사람으로
아무 역할도 맡기지 않은 채
“괜찮아?” 하고 먼저 물어봐 주는 목소리를 들어보고 싶다.
늘 먼저였던 사람이 잠시 늦어도 되는 자리.
누나가 아닌,
그냥 나로.
< 나의 하나뿐인 동생 >
# 백 원 #결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