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역하지 않은 딸

by 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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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입던 남자한복을 물려 입은 막내딸의 돌




《아버지께 보내는 뒤늦은 고백》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나는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가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슬픔 뒤에 따라온 감정은 의외로 ‘홀가분함’이었다.

구 남매라는 북적이는 울타리 안에서 나는 자주 남겨진 아이였다.

경기도에서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 서촌 효자동에 집을 마련하셨다.
큰언니와 둘째, 셋째, 그리고 여섯 살 늦둥이 아들은 서울로 향했다.

딸 여섯을 낳고서야 얻은 아들. 그 아이는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사립학교 교복을 입고

빛나는 ‘소공자’처럼 서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경기도의 시골 풍경 속에 남겨졌다.

방학이 되어야 엄마 손을 잡고 손님처럼 효자동 집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서울 집은 늘 낯설고 조용했다.

엄마가 레이스 달린 원피스를 사 오던 날, 노란 우비와 장화를 내 앞에 놓아주던 날.

말이 적던 아버지의 한마디가 떨어졌다.
“무엇하러 아이를 그렇게 사치스럽게 키우느냐.”

그 말이 공중에 떠도는 동안 나는 엄마의 눈을 보지 못했다.

엄마가 내게 주고 싶었던 사랑은 아버지의 서늘한 한마디에 가로막혔다.


그날 이후, 예쁜 옷은 내게 죄수복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나 때문에 엄마가 혼나지는 않을지, 내가 예뻐 보이는 것이 누군가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지
어린 나는 먼저 걱정부터 배웠다.

예쁜 옷이 죄가 된 순간, 나는 빛을 줄이는 법을 익혔다.

길을 걷다 사람들이 “예쁘다”라고 말할 때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덧붙이셨다.

“사람은 겉모습이 예쁠수록 내면은 더 겸손해야 한다. 교만해지면 안 된다.”

그 말은 칭찬을 지워버리는 지우개처럼 내 마음 위를 지나갔다.

열일곱, 미대 진학의 꿈은 아버지의 단호한 “NO” 한마디에 접혔다.

단과 학원 앞에서 나를 따라오던 남학생들을 말없이 막아서던 아버지는
결국 학원 수강을 그만두라 하셨다.

그날 이후 나는 꿈보다 안전을 먼저 선택하는 법을 배웠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않는 아이.
‘착한 딸’이라는 배역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아버지가 떠난 뒤,

나는 처음으로 그 배역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떠나신 뒤, 오빠를 통해 뜻밖의 말을 전해 들었다.

무뚝뚝하고 엄격하기만 했던 아버지가 생전에 오빠에게 슬쩍 내뱉으셨다는 그 한마디.

“은영이는 내게 참 특별한 딸이다.”

그 한마디가 내 가슴에 내려앉는 순간, 꽁꽁 얼어붙어 있던 원망의 마음 한구석이 쩍 하고 갈라졌다.

나를 칭찬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귀해서 혹여라도 세상의 풍파에 상처 입을까 봐 당신만의 방식으로 꽁꽁 묶어두셨던 것이었을까.

아버지는 내게 ‘특별하다’는 말을 직접 건네는 대신,

‘겸손’이라는 단단한 갑옷을 입혀주려 하셨던 걸지도 모른다.



아버지,
이제야 말씀드립니다.

당신이 떠난 뒤 제 안에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슬픔이 아니라 숨통이 트이는 감각이었습니다.

그것이 불효일까 오래 망설였지만 이제는 압니다.

저는 그저 제 몫의 삶을 시작하려 했던 것뿐이라는 걸.


아버지가 제게 주셨던 ‘겸손’이라는 말,
그 안에는 사랑도 있었겠지요.

세상이 딸에게 언제나 다정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에,

저를 눈에 띄지 않게 단단히 숨겨두고 싶으셨던 건지도 모릅니다.

그 방식이 제게는 작게 숨 쉬는 법을 배우게 했지만,

그것 또한 아버지 나름의 보호였음을 이제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빛을 낮추지 않고도 겸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제는 ‘아버지의 착한 딸’이 아니라 그냥 저로 살겠습니다.

부디 그곳에서는 저를 평가하지 마시고,

단 한 번만 이렇게 말해 주세요.

“애썼다.”

그 한마디면 저는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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