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승원 씨, 저 기억하세요?
어느새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시작했던 주부 모델 일.
어린 딸을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았던 나는, 일의 조건을 늘 까다롭게 따질 수밖에 없었다.
촬영 시간, 대기 시간, 개런티.
현실은 늘 계산기 위에 올려두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번 CF를 함께했던 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민여사님~ 이번에 제가 연출 맡은 드라마에 단역으로 출연해 주실 수 있을까요?”
드라마는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촬영은 길고, 단역은 기다림이 길었다.
톱 배우 스케줄에 맞춰 하루가 흘러가도 내 장면은 몇 분 남짓이었다.
그런데 감독의 한 마디가 마음을 흔들었다.
“차승원이 주연인데, 부잣집 사모님이랑 대화하는 장면이에요.”
오호, 차승원이라니.
그동안 CF에서는 ‘평범한 주부’ 이미지가 기본값이었다.
평소보다 더 옅은 화장, 더 수수한 옷차림.
광고를 본 친구들은 늘 말했다.
“너 실물보다 훨씬 밋밋하게 나오더라.”
그 말이 어쩐지 아쉬웠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서보고 싶었다.
나는 메이크업 코디 없이, 내가 하던 화장 그대로.
즐겨 입던 정장 중 가장 화려한 색을 골라 입었다.
‘부잣집 사모님’이라는 설정에 나만의 색을 입혀보고 싶었다.
촬영장은 일산의 한 아파트 단지 안 커피숍.
스태프들이 분주히 세팅하는 사이, 나는 그에게 먼저 다가갔다.
차승원은 화면에서 보던 그대로 키가 훤칠했고, 의외로 차분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차승원 씨랑 촬영한다고 했더니 동네 친구들이 사진 찍어오래요.”
그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이 흘렀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구석에 앉아 있던 나에게 먼저 다가왔다.
“저랑 사진 찍으시죠~”
나는 그제야 떠올렸다.
동네 친구들이 부탁했던 그 ‘숙제’를.
촬영감독의 농담이 오가는 사이, 우리는 카메라 앞에 섰다.
나란히 서서 웃었다.
찰칵.
그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오래 남았다.
내 앨범 속에는 그날의 사진이 아직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선명해지는 건 사진보다 태도다.
약속을 기억해 주는 사람.
사소한 부탁을 가볍게 넘기지 않는 사람.
단역 배우에게도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네는 사람.
요즘도 브라운관에서 그를 보면 괜히 반갑다.
연기보다 먼저 떠오르는 건 그날의 한 마디다.
“저랑 사진 찍으시죠~”
차승원 씨, 혹시 기억하세요?
일산의 커피숍에서 유학 간 따님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 한 장을 함께 찍었던
그 부잣집 사모님을.
나는 아직도 그 사진을 꺼내 보며 생각한다.
사람은 결국 자신의 태도로 기억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