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에 닿은 첫사랑의 책장

선생님 ~ 저를 형수님이라고 부르셔야 해요

by 리치





내 인생의 첫사랑은 사랑이라는 말을 알기도 전에 찾아왔다.

중학교 1학년, 국어 시간마다 교단에 서 있던 스물넷의 선생님.
서울대 사범대를 막 졸업하고 부임한 젊고 단정한 청년이었다.

그는 내게 늘 ‘선생님’이었지만 나는 이미 그를 목소리로, 필체로, 문장을 다루는 손끝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열 살의 나이 차이, 셋째 언니와 동갑이라는 사실 같은 건 그 나이에 중요하지 않았다.
국어 교과서보다 선생님을 먼저 펼쳐 읽던 시절이었다.

국어 시간이 있는 날이면 교실 뒤 거울 앞은 늘 내 차지였다.
머리를 빗고, 옷깃을 여미고, 괜히 분필 가루 묻을까 교복 소매를 털었다.

누가 보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땐 부끄러움보다 설렘이 먼저였다.


“넌 고민이 없는 애 같아.”친구들이 그렇게 말하던 나는 실은 하나의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선생님을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온 마음이 꽉 차 있었으니까.

1학년 전교생이 알 정도로 나는 유명해졌고,
그 유명세만큼이나 내 국어 성적은 늘 ‘수’였다.


그러다 방학을 앞둔 어느 날, 교실에 퍼지는 말 한마디가 나를 절망적으로 몰아넣었다.

“국어 선생님, 내년에 군대 가신대.”그날 나와 친구 몇 명이 선생님을 미행했다.

같은 반, 같은 마음을 품은 아이들 몇 명과 함께.


하숙집이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이별에도 준비가 필요하다고 그때의 나는 진심으로 믿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어느 골목에서 조용히 사라졌고
나의 첫사랑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끝나버렸다.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돌아온 날, 우체통에서 발견한 카드 한 장이

그 생각을 단숨에 뒤집었다.

익숙한 이름, 익숙한 필체. ‘공군***부대, 소위 ○○○ '

“놀랬나? 어느 고등학교에 가게 됐는지.”

짧은 문장을 나는 몇 번이고 읽었다. 접었다 펴고, 또 접었다.

하지만 답장은 쓰지 않았다.

그 카드를 받고도 답장을 쓰지 않았던 건, 내 마음이 세상에 나가기 전에
‘비밀’이라는 서랍이 먼저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서툰 고백이 빛을 들고 밖으로 나서는 순간,
그 반짝임을 먼지처럼 흩뜨릴까 봐 나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스무 해가 흘렀다. 결혼을 했고 아이를 키웠고 평범한 일상을 살았다.

그런데도 선생님의 소식은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남편은 내가 다른 어떤 과거보다 이 이야기만 꺼내면 묘하게 질투를 했다.

나는 웃으며 말했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 ‘지나간 나’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라는 걸.


동창들에게 수소문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선생님을 찾았다.

선생님은 내 기대와 달리 공군 제대 후 유명 학원 강사가 되어 있었다.

전화기를 들고 학원 번호를 누르던 순간, 손끝이 떨렸다.

“선생님, 저 민은영이예요.”

“그럼, 기억하지.”

그 한마디로 시간은 단숨에 접혔다.


우리는 집 근처 작은 일식집에서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예순을 바라보는 선생님과 오십을 바라보는 나.

서로의 얼굴에는 세월이 있었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선생님은 여전히 애처가였고 두 딸의 자랑을 천천히 꺼냈다.
휴대폰도 없이 여전히 단정한 사람이었다.

식당을 나와 택시를 잡아드리겠다는 내 말에 선생님은 극구 고개를 저으셨다.
지하철이 편하다며 역으로 걸어가셨다.


역으로 향하는 길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은영이 남편은 좋은 사람일 거야.”

“왜요?”
“은영이랑 사는 사람이니까.”

다음엔 남편도 함께 만나서 술 한잔하고 싶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선생님, 저한테 형수님이라고 하셔야 해요. 제 남편이 한 살 더 많거든요.”

그날 밤, 선생님 댁으로 전화를 걸자 사모님이 받으셨다.

“우리 남편이요, 오늘 많이 웃고 들어왔대요. 잊지 않고 남편을 찾아줘서 고마워요.”

30년 만의 재회는 생각보다 짧았고 생각보다 조용했다.


세월을 등에 진 구부정한 모습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선생님을 서글프게 바라보며

이제 그만 열네 살의 나도 배웅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리 없이 터져 나온 눈물은, 멈춰 있던 나의 첫사랑, 선생님과 나의 풋풋했던 청춘을 보내는 마음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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