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 보관소의 균열

조용히 숨겨둔 감정은, 결국 스스로 길을 낸다.

by 부엄쓰c


보관소는 달라지고 있었다.

작고 미세한 변화는 마치 벽에 간신히 난 금처럼 보이지 않게 스며들었지만, 그 균열은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만큼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재현은 점점 더 자주 혼자였고, 소은은 무언가에 짓눌린 듯 말수가 적어졌다. 나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에 자주 휩싸였다. 이 공간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고요한 평온 대신 팽팽한 긴장이 방 안을 채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휴게 공간에서 소은이 조용히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이곳에서 정말 나아지는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가 하는 건 그저 견디는 것뿐인 것 같아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내 마음속 깊은 어딘가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그때, 맞은편에 있던 재현이 갑자기 책을 덮으며 날카롭게 말했다.


“견디는 게 전부라면, 왜 여기 있어야 하는 건가요? 차라리 전부 잊는 게 낫지 않나요?”


소은의 표정이 굳었다.


“잊을 수 없으니까 여기에 온 거잖아요. 잊을 수 있었다면 진작 그렇게 했겠죠.”


재현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결국 변명뿐이네요. 잊을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면서 언제까지 여기서 같은 말을 반복하실 건가요?”


방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그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만해요, 재현 씨. 여기서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잖아요.”


소은의 목소리는 떨렸다.

재현은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왜요? 여기선 감정도 드러내면 안 되나요? 결국 우리는 숨기고 견디라는 이야기밖에 듣지 못하잖아요.”


나는 그 순간, 이전까지 조용히 감싸놓았던 내 마음속 불안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알았다. 재현의 말은 내가 숨기고 있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때 선우가 방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는 조용히 방을 둘러보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정은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터뜨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선우의 목소리엔 전에 없던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마주한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재현이 차갑게 반문했다.

선우는 담담히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진짜 마주한다는 건, 그 감정이 주는 고통을 그대로 견디는 겁니다. 억누르거나 외면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는 거죠. 그때 비로소 그 감정은 더 이상 당신을 지배하지 않게 됩니다.”


재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소은은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방 안에는 묵직한 침묵만이 남았다.


나는 선우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기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결국 우리는, 지금까지 감정을 피하기만 했던 거야. 하지만 이제는 피할 수 없어.’


균열은 이미 시작되었고,

더 이상 아무도 그 균열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 이곳이 진정한 의미에서 어떤 공간인지.


여기는 결국, 스스로를 온전히 마주하고 그 고통마저 끌어안을 준비를 하는 곳이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살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내 마음은 무겁고 차가웠다.


하지만 그 무거움이, 이제부터 내가 마주해야 할 길이라는 것을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복도의 끝에서 차가운 시선 하나가 나를 향해 있다는 걸 느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긴 검은 머리와 차갑게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서윤이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세한 냉소가 어려 있었고, 마치 이 모든 균열과 혼란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몸이 굳어지는 듯한 불안감을 느꼈다.


서윤의 등장은 무언가가 곧 크게 흔들릴 거라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불길한 예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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