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잊히지 않고, 다만 잠시 머무를 뿐이다.
재현의 방을 나온 뒤, 나는 선우의 안내로 또 다른 공간 앞에 섰다.
“여기가 소은 씨의 방이에요.”
나는 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후회보다도 더 무거운 무언가가 이 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선우는 내 옆에서 한 걸음 떨어져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따뜻한 눈빛이 내 불안한 마음을 조용히 다독이는 것 같았다.
천천히 문을 열자 포근하고 부드러운 빛이 나를 맞았다. 하얀 커튼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어 공간 전체를 따스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 따스함 속에 스며 있는 옅은 슬픔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방 한가운데 작은 소파 위에 앉아 있던 여자가 책을 덮으며 나를 보았다.
“왔네요.”
그녀는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은 미소와는 달리 차갑게 빛났다. 마치 그 안에 깊고 오래된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 곁에 앉았다. 소은은 나를 한 번 바라본 뒤,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돌렸다. 그 시선이 닿은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녀에게는 분명히 무언가가 존재하는 듯했다.
침묵이 방 안에 가만히 머물렀다. 서두르지 않았다. 충분히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소은이 먼저 말을 꺼냈다.
“사랑해 본 적 있나요?”
나는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마치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통제할 수 없는 감정들이 쏟아질 것 같은 두려움을 주었다.
내 침묵을 보고 소은이 작게 웃었다.
“저는 사랑이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나의 모든 이유였고, 내 삶 그 자체였죠. 그땐 그게 영원할 줄 알았어요.”
소은의 목소리는 고요했지만, 그 안에 서린 슬픔이 진하게 전해졌다.
“그런데 사랑의 끝은 언제나 갑작스럽더라고요. 그 사람이 갑자기 내 곁에서 사라졌을 때, 나 자신도 같이 사라져버린 기분이었어요.”
나는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가슴에 새기며 조용히 귀 기울였다.
“그래서 여기 온 거예요. 사랑을... 잊고 싶어서요.”
그녀의 표정은 역설적이게도 잊으려는 마음보다 오히려 깊은 그리움과 아픔이 더 선명했다.
“그런데 잊히지 않더라고요. 사랑은 내 의지대로 지워지는 감정이 아니니까.”
그녀는 힘없이 미소 지었다.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여기에 머무는 건가요?”
소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완전히 잊을 순 없겠지만, 잠시라도 덜 아프고 싶어서죠. 언젠가는 다시 마주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아직은 너무 아프니까요.”
그녀의 말이 내 안 깊숙이 스며들었다. 사랑이란 결국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다시 꺼내 봐야 할 기억 속의 감정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소은은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덧붙였다.
“이곳은 그런 곳이에요. 사랑을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다시 마주할 준비가 될 때까지 잠시 맡겨두는 곳.”
나는 그녀의 말을 깊게 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내 안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외면했던 감정 하나가 작은 숨을 쉬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나는 깨달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결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어딘가에 머물러 조용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주 작은 용기를 내었다.
‘괜찮아. 아직은 조금 아프지만, 언젠가는 나도 그 감정을 다시 마주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외면했던 내 안의 감정과 조금씩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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