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 재현의 방 (후회 2)

잊을 수 없는 기억이 길이 될 때

by 부엄쓰c


재현은 방 한가운데 서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숨소리가 방 안의 고요한 공기 속에서 부드럽게 흔들렸다. 희미한 빛 입자들이 그를 둘러싼 채 고요히 멈춰 있었다.


“이 방에서 정말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그가 눈을 떴다.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고, 그 안에는 작지만 확실한 빛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수없이 과거를 바꿔보고 싶었지만, 아무리 반복해도 그 순간은 그대로였어요.”


재현의 말과 함께 빛 입자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마치 수많은 기억의 조각처럼 방 안을 채웠다.


나는 그 빛 중 하나에 손을 뻗었다. 빛이 내 손끝에 닿자, 흐릿한 장면이 펼쳐졌다.


늦은 밤, 재현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방문 너머로 부모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재현이는 늘 기대에 부응해줘. 정말 착한 아이야.”


어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도 어린 재현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손에 쥔 종이가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목이 메었다.


“부모님의 기대를 벗어나면 제 존재 가치가 사라질까 봐 두려웠어요.”


재현의 목소리는 고요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솔직히, 처음엔 부모님이 미웠어요. 제 진짜 감정이나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묻지 않고, 늘 칭찬으로만 나를 옥죄는 것 같았으니까요. 하지만 또 부모님을 온전히 미워할 수 없었어요. 그분들은 그런 방식으로 나를 사랑했다고 믿으니까요. 결국 그 분노와 원망을 부모님이 아니라, 오롯이 나 자신에게 돌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는 손을 뻗어 빛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빛은 천천히 떨리며 다시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 순간 재현이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하연 씨도 그런 경험이 있나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함께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계속 떠올라요. 연락을 받고 아버지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마음 한구석이 무겁게 가라앉았죠. 하지만 그때의 나는 일에 매여 있었고, 회사 사람들의 시선과 업무의 압박감 때문에 억지로 불안을 외면했어요. ‘이번에도 괜찮겠지’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결국 아버지 곁으로 가지 않았죠. 그런데 그게 마지막 기회였다는 걸 그때는 몰랐어요.”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정말 원했던 건 아버지와 마지막을 함께하는 거였는데, 나 자신의 진짜 마음을 외면한 채 살아왔어요.”


재현은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었다.


“저도 재현 씨처럼 후회가 있었어요. 그 후회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재현 씨 덕분에 알게 됐어요. 후회가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길을 비춰주는 빛이라는 걸요.”


재현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맞아요. 후회는 우리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비추는 작은 빛이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방 안의 공기는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기 전 재현을 돌아보았다.


“고마워요, 재현 씨.”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저도 하연 씨 덕분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문 손잡이를 잡은 채,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지금껏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해 아버지께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하고만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걸, 비로소 인정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이제야 알았다. 내가 나를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사랑이라는 걸.’


천천히 눈을 뜨자 내 안에서 작지만 따뜻한 빛이 퍼져 나가는 듯했다.


방을 나서자 선우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후회를 마주하는 건 힘들었죠?”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래도 그 덕분에 다음 문을 열 용기가 생겼어요.”


선우는 나를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좋아요. 다음 방에는 더 깊은 상처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후회의 빛이 내 안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이제는 괜찮아요. 내가 마주해야 할 감정이라면 도망치지 않고 마주할 준비가 됐어요.”


선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다음 방으로 안내했다.


방을 나서려는 순간, 복도 끝에서 작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우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은이라는 사람이 머무는 방이에요. 사랑이라는 감정이 기다리고 있죠.”


사랑이라는 말이 묘하게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는 천천히 열린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7화 예고] 소은의 방에서 하연은 오랫동안 외면했던 사랑의 감정과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