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에 부응하려다 놓쳐버린 나 자신
재현은 천천히 손잡이를 돌려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에서 불어오는 공기는 어딘가 무거웠고, 온몸을 조용히 감싸는 듯했다.
“들어와요, 이하연 씨.”
나는 잠시 망설이다 그의 뒤를 따라 천천히 방으로 들어섰다. 방문이 닫히자 방 안의 세상은 마치 우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멈춰버린 듯 완벽한 침묵 속에 갇혀 있었다.
방 안에는 따뜻한 빛이 아주 작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천장에는 보이지 않는 별처럼 희미한 빛의 입자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들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였지만, 내가 손을 뻗자 손가락 사이로 조용히 흩어졌다.
“이곳은 참 이상한 곳이에요.”
재현이 천천히 말했다.
“이 방에 오면 후회가 실체를 갖게 돼요. 볼 수도, 만질 수도 있고... 그래서 후회로부터 도망치는 게 불가능해지죠.”
그의 말에 나는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작은 책상 위에는 낡은 액자 몇 개가 놓여 있었고, 오래된 기타 하나가 벽에 기대어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방은 꽉 차 있는 듯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공기 중을 가득 메우고 있는 듯했다.
재현은 책상 앞으로 걸어가더니 액자 하나를 들어 내게 보여주었다. 사진 속에는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재현이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서 있었다. 부모님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운 미소가 가득했고, 재현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저는 부모님의 자랑거리였어요. 언제나 착했고, 공부를 잘했으며, 원하는 것을 이루었죠. 하지만 그것들이 진정 제가 원하는 것이었는지는 한 번도 묻지 않았어요.”
그는 사진 속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그저 부모님이 정한 기대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어요. 지금 돌이켜 보면, 내가 나 자신을 믿는 법을 몰랐던 것 같아요.”
재현은 다시 액자를 내려놓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끝이 액자 위를 스쳐 지나자, 사진 속의 풍경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진 속 어린 재현은 표정을 잃은 채 부모님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걷는 그 모습은 차마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로 슬펐다.
나는 숨을 죽이며 그 장면을 지켜봤다. 방 안의 빛들이 사진 위를 조용히 맴돌았다. 재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그때 두려웠어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면 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죠. 그래서 제 감정을 숨겼어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물어보는 것조차 두려웠어요. 부모님이 원하지 않는 답이 나올까 봐.”
재현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제 감정을 완전히 잃어버렸어요. 행복한 건지 슬픈 건지,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죠. 어느 순간 저는 마치 빈 껍데기처럼 살아가고 있었어요.”
재현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 풍경을 오랫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정말 어리석었어요. 하지만 그때 저는, 그 선택이 최선이라고 믿었죠. 그때의 저는 아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라는 감정은 그렇게, 스스로를 붙잡으면서도 놓지 못하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긴 침묵이 흘렀다. 방 안의 빛 입자들은 여전히 우리 곁을 맴돌며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어쩌면 제가 정말로 원하는 건 과거를 바꾸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다시 살아갈 용기인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그의 말에 조금 놀라 그를 바라봤다. 재현의 표정은 진지했다.
“이 방에서 수없이 후회를 반복하면서 깨달았어요.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그 후회를 통해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아주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게 된다는 걸요. 이제는 후회에서 도망치는 대신, 그 후회를 안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재현의 눈빛에는 이전보다 훨씬 뚜렷한 힘이 담겨 있었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어쩌면, 후회는 지우는 게 아니라 앞으로 걸어갈 길을 조금씩 밝혀주는 작은 빛 같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재현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아팠지만, 이제 그 미소엔 단단함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의 후회가 여전히 곁에 남아 있는 이유를.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제 그 후회가 그의 앞으로의 삶을 비추는 작은 빛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앉아,
창밖의 어둠 너머로 서서히 밝아오는 새벽을 바라봤다.
방 안의 공기는 점점 더 따뜻해지고 있었다.
[6화 예고]
“후회는 때때로 잊고 싶어서가 아니라, 잊히지 않아서 곁에 남는다.” 재현은 여전히 방 안에서 머물며, 과거와의 대화를 계속한다. 과연 그는 그 후회를 안고 진정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작가의 말]
어제 새벽에 올리려다 재현의 이야기를 더 다듬는 데 시간이 걸렸고, 야근까지 겹쳐 하루 늦어졌습니다. 기다려주셔서 죄송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