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잊기 위한 곳이 아니라, 다시 느끼기 위한 곳이었다
부드럽게 울리는 종소리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낯선 천장과 어두운 방 안 풍경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고 아늑한 방, 희미한 조명, 책상 위의 낡은 수첩. 어제의 기억이 천천히 떠올랐다.
「나는 괜찮지 않다.」
수첩에 적힌 문장을 떠올리자 가슴 한쪽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여전히 막막했고 불안했지만, 아주 작은 기대도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쩌면 어제와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가능성.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하연 님, 일어나셨어요?”
문 너머로 이선우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둘러 세수를 하고 머리를 매만졌다. 숨을 고르고 문을 열자, 선우는 부드러운 미소로 나를 맞았다.
“밤새 잘 쉬셨나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선 혼자 머물러도 좋지만, 가끔은 함께하는 것이 큰 위로가 됩니다.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으니, 다른 분들과 가볍게 인사 나눠 보시겠어요?”
나는 긴장했지만, 그의 따뜻한 미소에 용기를 얻었다.
복도로 나서자 희미한 빛이 벽에서 흘러나와 우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 작은 빛들이 피어오르며 따뜻한 느낌을 전했다. 마치 나를 위로하는 듯한, 잊었던 기억이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선우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곳에서는 감정을 잠시 맡기기도 하고, 잃었던 감정을 다시 찾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이곳에서 다시 자신과 마주할 힘을 얻는 것이죠.”
그의 말은 내 마음을 잔잔하게 울렸다.
복도 끝에 나타난 식당은 작고 아늑했다. 긴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들이 있었다. 세 사람이 각자 자리에 앉아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짧은 머리의 남자는 무심히 음식을 만지작거렸고, 긴 머리의 여자는 조용히 음식을 음미했다. 창가의 검은 머리 여자는 거의 먹지 않은 채 바깥만 바라보고 있었다.
선우가 부드럽게 말했다.
“모두 잘 주무셨나요? 이분은 이하연 님입니다. 앞으로 우리와 함께 지낼 거예요.”
짧은 머리 남자가 먼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한재현입니다. 여기 오래 있었지만 새 얼굴을 보니 좋네요.”
그의 목소리는 친절했지만 어딘가 쓸쓸했다.
긴 머리의 여자가 따뜻한 미소로 말했다.
“저는 이소은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마지막으로 창가의 여자가 차갑고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윤서윤이에요. 환영 인사는 못 하겠지만, 뭐… 아무튼.”
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처음엔 조용히 식사만 하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자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날씨, 음식, 사소한 일상. 조금씩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식사를 마친 후, 선우의 안내로 우리는 작은 별실로 자리를 옮겼다. 방 안은 따뜻한 간접 조명으로 은은하게 밝혀져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향긋한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따뜻한 차잔을 손으로 감싸고 방 안의 조용한 분위기를 의식하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아직 서로에게 익숙지 않은 어색한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재현이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여기에 처음 올 때는 다들 뭔가를 맡기고 싶어서 오죠. 그런데 사실… 돌아갈 준비가 되지 않으면, 그걸 다시 찾기도 쉽지 않아요.”
나는 재현의 말에 깊은 공감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재현 씨는… 어떤 마음을 맡기러 오셨던 거예요?”
재현은 차잔을 내려놓고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말했다.
“저는 과거에 저지른 어떤 실수를 잊고 싶었어요. 생각할수록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기억이라서요.”
방 안은 그의 말로 인해 잠시 무거워졌다. 소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는 누군가를 너무 오래 놓지 못했어요. 그 사람은 이미 떠났는데… 저 혼자만 같은 자리에 계속 머물고 있었죠.”
서윤은 차가운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다 무심하게 말했다.
“저는 그냥… 저 자신이 싫었어요. 감정 같은 거, 가지고 있어봐야 고통스럽기만 하니까.”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저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이대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저 자신이 괜찮지 않다는 걸 여기 와서야 처음 알게 됐어요.”
나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우리는 잠시 침묵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헤아렸다.
그때 재현이 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하연 씨, 괜찮으시다면 나중에 제 방에 잠깐 들러 보시겠어요? 여기에 혼자 있는 것보단 가끔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나을 때도 있거든요.”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나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준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이 어제보다 조금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다음 이야기 | 5화 재현의 방 (후회 1)
재현의 방 앞에 서자,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 문 너머엔 그가 오랫동안 외면했던 후회의 기억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