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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카르도 Sep 26. 2024

영안(靈眼)의 개들

개들이 영혼을 본다는 소문에 관하여

이데올로기를 모르는 도솔이는 내 아버지와도 가깝게 지냈.

도솔이는 노쇠하신 아버지가 이름을 잘못 불러도, 매너 없이 귀를 잡아당겨도 제나 꼬리를 흔들며 아버지의 손길을 반겼다.


그러나 정치적인 신념이 극과 극이었던 아버지와 나는 명절날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대화하지 않았다.


부럽게도 도솔이는 선거날에 누구와도 불화하지 않았다.

도솔이는 시대의 박애주의자였다.     




아버지는 50세를 훌쩍 넘어 나를 낳았다. 

이른바 쉰둥이로 태어난 내가 아버지와 반목하기 시작한 것은 내가 대학을 철학과로 진학할 것이라고 선언했을 무렵부터다.     

아버지는 내가 일곱 살 때부터 남자는 S대 경제학과를 나와서 <한국은행>에 입사하는 것이 최고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미취학 아동이었던 나는 우리은행 통장을 개설하기 전부터 중앙은행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아도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렇다고 아버지는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부류의 부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중학교 때 다른 아이들처럼 학원에 보내달라고 청하니까 놀랍게도 거절하셨다.

아인슈타인은 학원에 다녀서 물리학을 깨우쳤냐며, 학원은 지진아들이 다니는 곳이니 공부할 자신이 없다면 하지 말라고 도리어 나를 야단치셨다. 

학원 보내줄 형편이 안된다고 말씀하셨다면 오히려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저 스스로 공부하겠다며 동네 학원에 보내달라는 자녀의 말에, 부모가 아인슈타인이야기로 면박을 준 경우가 전국에 있는지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나는 억울하다.

학창 시절 공부를 곧잘 해도 나는 아버지에게 조금도 어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수재이셔서 학창 시절에 2년씩이나 월반을 하였고, 그래서 동년배들보다 어린 나이에 <서울대 수학과>에 진학하셨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수학과를 다니는 아버지가 영어’ <통역 장교>로 군복무를 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수학과 영어를 전국에서 가장 잘하는 아버지를 둔 쉰둥이 막내아들은 반에서 1등을 해도 칭찬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인슈타인을 운운하며 날 학원에 보내지 않은 일을 세월이 지나 돌이켜보니 납득이 가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아버지의 유년기에는 사교육 시장이 전무했고, 사실 공부는 한 자 한 자 스스로 깨우치는 노력으로 더 소중하게 얻어질수록 깊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생 때 아버지는 이미 노년이셨다.

그리하여 생전에 아버지는 당신의 초반 노년기, 중반 노년기, 후반 노년기의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내셨다. 각각 60, 70, 80대의 연령구간을 말한다.

 

후반 노년기에 접어든 아버지께서는 집안에서 오직 도솔이 하고만 안부인사를 나누었다.

기특하게도 도솔이는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버지의 유일한 말벗이 되어주었다.

도솔이는 여러 사람을 살렸다.

도솔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집안에 내려주신 네발 달린 흰 천사다.      


부자지간의 반목이 오래도록 지속된 것은 철학과로 진학을 하고 성인이 되어 투표할 수 있게 된 나를 아버지가 이번엔 빨갱이라고 미워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유시민 작가님의 북콘서트에 따라다니는 나를 한심하게 생각했다.     

유시민 씨는 글로벌 스탠더드로 분류했을 때 모가 나지 않은 중도좌파 수준의 러버럴리스트이고, 결코 극좌가 아니에요 아빠. 이를테면 사민당 계열의 영국 노동당과 유사한 입지에서 사회투자국가 모델로의 체질 전환을 주장하는, 제3의 길을 외치는 부류일 뿐이라고요 아빠.

나는 정성을 다해 아버지에게 설명드렸다.


나보고 유학은 전공을 경제학으로 바꾸어 런던 정경대(LSE)’로 가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에게 영국의 정치 현황을 빗대어 설명하면 못 이긴 채 묵시적으로 인정해 주실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1930년생으로 625 전쟁을 몸소 체험한 아버지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실제로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중위 계급을 단 스무살의 나이로, 사단장 통역관으로서 소형 전투기를 타고 미군 참모진들과 함께 전장터의 전후방을 누볐다. 


냉전 시대의 피비린내 나는 참상을 두 눈으로 목격하신 아버지의 이분법적인 세계관에서 한번 확언된 빨갱이 낙인은 좀처럼 거두어지질 않았다.     

나에게 아동학대의 트라우마가 있는 것처럼 아버지에게는 전쟁의 참상으로부터 생성된 빨갱이 트라우마가 뼛속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나의 친할아버지 즉, 아버지의 아버지께서는 부르주아지 계급의 자유주의자라는 이유로 북조선 노동당에 끌려가 안타깝게도 마흔의 나이에 총살되어 소천하셨다.

평안남도 안주 지역의 고위직 공무원으로서 동생들만을 일본 동경으로 유학 보내고, 홀로 가문을 지키고 계셨다가 당하신 참극이었다.

도주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자유주의 사상을 버리기를 강요하는 북조선 노동당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끝까지 당당하게 신념으로 맞섰다는 이야기가 내 가슴을 울렸다.          


오래전 냉전시대의 북조선 노동당과 새로운 시대의 영국 노동당이 발 딛고 있는 정책기조의 차이를 아버지로서는 분별할 마음의 여유가 없으신 것이었다.

내 나이 서른 후반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죽음의 이데올로기가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변주되어것으로써 낙인찍고서 아버지는 사민당 계열의 목소리들을 혐오했다.

졸지에 나는 아버지의 정적(政敵)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소천하시고 생각해 보니 아버지와 반목했던 그 모든 논쟁이 무가치했다.

노쇠하고 고독해지신 아버지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 아버지 머리에 인이 박힌 빨갱이 트라우마를 가슴으로 이해하고 보듬어드렸어야 했다.     

생전에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한 번도 말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

도솔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것의 천분의 일이라도 아버지에게 표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좌) 한국전쟁 당시 육군 통역장교로 전장터를 누비신 아버지 (셋 중 가운데) / (우) 미군 고문관으로부터 표창 받는 아버지


아버지는 노년에 방송통신대학교에 등록을 하시고, 연중무휴로 뚝섬에 있는 방송통신대 도서관을 이용하셨다. 십여 년 동안 아버지는 새벽부터 나가셔서 방통대 도서관에서 365일 책만 보셨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아버지는 한국군 대표로 미국의 사관학교로 유학을 다니온 뒤 육군 본부에서 요직을 맡으셨다. 젊은 나이에 유능하셨던 아버지는 제3공화국 시절 청와대 상공 비서관으로 임명되셨고 박정희 대통령을 모셨다. 아버지 나이가 34살 때였다.

어릴땐 몰랐다. 성인이 되서야 아버지가 왜 나를 그토록 한심하게 생각하셨는지 깨닫게 되었다.


누가 먼저 말 걸기 전에 아버지는 그 누구에게도 먼저 말을 건네지 않는 성격이셨. 방통대 도서관에서는 말동무가 있으셨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도서관에서 귀가 한 아버지는 이따금 거실로 나와 은근슬쩍 도솔이에게 먼저 다가가 도솔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어주며 도솔이를 이뻐하셨다.

아버지는 도솔이와는 잘도 대화를 나누곤 하셨다.

그 누구와도 불화하지 않는 도솔이는 역시 소통의 달인이다.          


80대 후반이 되시니 기력이 쇠하신 게 눈이 띄었다.

매일 365일 연중무휴로 도서관에 가시던 아버지의 출타가 불규칙해졌고, 일 년 후 아버지는 더 이상 일어나실 수가 없게 되셨다.     


돌아가시기 반년 전부터 나는 아버지의 수족이 되어드렸다.

요샛말로 한창때 알파남이었던 아버지는 이제는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가 되셨.     

대소변을 받아내고, 저염식으로 제조한 본죽을 사서 아침과 저녁마다 떠먹여 드렸다.

그러나 식욕을 잃으시고 계속해서 말라만 가셨다.

호랑이 같았던 눈매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한 마리의 순한 양이 되어 고분고분해지신 아버지가 낯설게 느껴졌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는 체중이 너무 많이 줄어 하지가 사시나무처럼 말라지셨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느꼈다.     


나는 아버지를 깨끗하게 전신 목욕시켜 드리려고 작정하고 날을 잡았다.     

아버지의 옷을 벗기고 안아 들어 올려 따뜻한 물을 받아 놓은 욕조에 비스듬히 눕혔다.

나 또한 속옷차림으로 상반신을 탈의하고 좁은 욕조 안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가 아버지를 뒤쪽에서 안았다.

가제 손수건에 비누를 풀어 온몸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닦아 드렸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 있는 슈퍼탕이라는 이름의 대중목욕탕으로 일요일 아침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목욕간 일들이 생각났다.

온탕에 들어가 몸을 뜨겁게 불리고 나오면 아버지는 빨간색 비누 타올로 내 몸을 손수 구석구석 닦아주셨다.

옆자리에 아저씨들이 늘 ‘할아버지랑 같이 왔니?’라고 물었다.

그 질문에 아버지가 민망할 것을 생각해 나는 아니요 우리 아빠예요!’라고 씩씩하게 대답하곤 했다.        


아기가 된 아버지의 온몸을 정성껏 닦아드리고, 눈에 비누가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세안도 해드렸다. 마지막으로 이를 닦아 드리려고 새 칫솔을 꺼내 양치질을 시작했다.

살살 어금니를 문질러 닦아 드리고, 앞니 쪽으로 이동해 와서 칫솔질을 하는데 그만 앞니들이 힘없이 넘어졌다놀랐지만 침착하게 ‘괜찮아요 아빠?’라고 물으니 숨만 거칠게 쉬신다.

열흘 전부터는 말하는 것조차 힘들게 되셨다.

이 닦이기를 그쯤에서 중단하고 빠진 이를 손수건에 챙기고 목욕을 마무리했다.      


성인이 되어 아버지와 함께한 처음이자 마지막 목욕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스킨십이었다.     


목욕을 하시고 열흘 후 아버지께서는 소천하셨다.     


사람은 약하게 태어나서 종국에는 누구나 세상에서 가장 작은'가 되어 하늘로 돌아간다.      


아버지가 소천하시고 나서 유품들을 정리하는데, 끝내 확신에 찬 ‘무신론자’이신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의 서랍에서 놀랍게도 성경책이 나왔다. ‘박장로라는 분의 서명이 있었고, 아버지의 메모들이 적혀있었다.      

아버지는 과연 영세받으셨을까.     

하느님 보시기에 개신교의 영세가 가톨릭의 영세와 다르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께서 나 몰래 목사님으로부터 세례 받으셨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섬뜩하고도 영험한 일들이 우리 도솔이에게서 일어났다.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온 그다음 날부터 보름 동안 도솔이가 현관문을 향해 짓는 일들이 잦아졌다.


개들이 귀신을 본다는 이야기는 흥미로운 주제.

정말 개들은 귀신을 볼 수 있을까.    

 

간혹 반려견들은 아무도 없는 특정 장소를 바라보거나 한 곳을 응시하며 계속 짖 하울링 하는 경우가 있다. 어떨 때는 자다가 중간에 깨서 벌떡 일어나 창문이나 현관문을 향해 기도 한.

개들의 청각은 67hz~ 45,000hz까지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인지하지 못하는 주파수 영역대의 소리를 듣고 물리적으로 반응한 것으로 보통은 해석한다.

그러나 과연 그게 다일까.     


우리나라의 소중한 토종견 삽살개는 예로부터 귀신 쫓는 개로 알려져 왔다. ‘삽살개라는 이름의 첫음절 없앤다, 제거한다라는 의미이고, 둘째 음절 귀신, 액운’ 뜻한다. 삽살개는 귀신과 액운을 막아주는 영험한 개다.

우리 도솔이 또한 대륙에서 귀신 쫓는 개또는 태양의 개로 불리며, 중국 황실에서 귀하게 대접받던 페키니즈 품종임은 여러 번 강조했다.     


귀신 쫓는 삽살개.


도솔이를 키우고 나서부터 개가 귀신을 본다는 이야기를 사실 나는 믿기 시작했다.

반려견을 키워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바보 소리를 듣게 되어도 나는 상관없다.

내가 보고 느낀 것은 적어도 나의 일인칭 관점에서는 진리일 테니까.


< 크리스토퍼 몰리 >
개만큼 당신이 하는 말의 핵심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생전에 아버지는 새벽부터 도서관에 가셔서 오후 6시가 되면 귀가하셨다.

도솔이는 오후 6시경에 귀가하는 아버지를 맞이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관문 맞은편에 있는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 이상 도솔이는 짖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 집은 7층이었고, 건물구조상 7층엔 우리 집만 단독 가구로 구성된 형태라 특별히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엘리베이터를 잘못 내리는 이들이 아주 가끔 있었을 뿐이다.

또한 다른 층의 남의 집 현관문에서 발생하는 소음과 우리 집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도솔이는 익숙하고도 정밀하게 구분한다. 모든 갯과 동물의 발달한 청력이 그것을 아주 쉽게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솔이가 아무 인기척이 없는 현관문을 향해 자꾸만 짖고 있다.

시계가 오후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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