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 북리뷰
나는 '잘 팔린다고 소문난 책'을 따라 읽지 않는 편이다.
책뿐 아니다. 영화도 그렇고, 유행도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읽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구에 회자된 이후' 즉, 아무도 다시는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때, 살이 찐다며 만류하는 엄마 몰래 훔쳐둔 초콜렛을 이불속에서 한조각 깨어물듯 꺼내어 읽는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도 그랬다. 우연히 책장을 정리하다가 다른 소설에 비해 얇디 얇은 책이라 '금방 읽겠구나' 생각하고 집어들었는데, 차마 끝까지 읽지 못하고 '아끼고 아껴서' 사흘만에 읽었다.
누군가 이 책을 두고 '무척이나 긴 시詩'라고 평했던데, 그 말이 틀림이 없다. 한 문장도 덜어낼 것이 없는 게, 헤밍웨이의 '하드보일드 스타일'과는 또 다른 단문이었다. 군더더기를 덜어낸 문장 하나를 읽을 때 마다 헤밍웨이의 그것보다 세 배는 더 많이 문장 속 이미지를 상상하게 했고 그에 빠져들수록 숨이 가파졌다. 7년 만에 나온 작품이라는데, 왜 그런지를 알 것 같았다. 오랜 시간 동안의 습작은 더 깊고 진한 밀도로 다가와 독자인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20세기 말 아일랜드를 뒤흔들었던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을 배경으로한 이 소설은, 불의를 보고도 현실과 타협하느라 모른 체 해야 하는 한 평범한 가장이자 사업가인 빌 펄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강 건너 불 보듯' 할 것 같지만, 같은 시기 우리나라에도 형제복지원을 필두로 한 사회복지를 가장한 수많은 만행들이 있었기에 스토리는 절대로 '남의 일' 같지 않았다.
"10월에 나무가 누래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복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Barrow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소설의 첫문장부터 '문장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느꼈다. 이 짧은 문장들로 내 머릿속은 찹찹한 가을의 흐린 풍경속을 헤매게 했다. '굴뚝 연기와 흑맥주처럼 검은 강물'은 뭔가 불길한 징조를 예감케 했다. 하지만 내 짐작은 틀렸다. 주인공인 사업자 빌 펄롱의 일상과 내면이 한참동안 기술됐다. 이 짧은 소설에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는 발단과 전개는 그가 얼마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지'를 말하고 있었다. 마치 작가가 '이 주인공은 이 소설을 읽는 당신과 다름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느꼈으니까.
하지만 한 사건이 말 그대로 '훅~' 하고 주인공에게 들어오고 그의 마음은 격정적이 된다. 정중동靜中動 으로 일상을 보내지만 '그 사건' 이후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 간섭하며 '나를 기억해'라고 외쳤다. 이런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20세기 말 뉴스나 르포 프로그램, 고발 프로그램 등에 한 달 에도 몇 번씩 전해지던 '부조리한 현장'들은 내 뇌리에 박혀 나를 괴롭혔다. '아니 세상에, 오늘날인데 이럴 수 있어?' 하고 분개했지만, 결국 나는 국가와 정부의 처분을 기다릴 뿐이었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잖아?' 하며 스스로 자위했다. 그리고 나는 아예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 편하게 잊었다. 투쟁 대신 안락함을 선택한 것이다. 지금껏 그런 삶에 내게 첨철된 것을, 덩치만 컸지 정작 용기가 없었음을 나는, 고백한다. 그랬던 내게, 아일랜드의 평범한 가장 빌 펄롱은 내가 잊고 있었던 그 날들을 오버랩시켰다. 그러면서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아니잖아!' 하고 등짝을 때렸다.
완독을 마치면서도 '이 짧은 글에 그렇게 굵직한 사건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거야?' 하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독자들이 완독을 하자마자 다시 읽기 시작했다는 말을 이제야 이해할 것 같았다. 외려 결말을 알고 난 뒤 다시 읽으면 더욱 키건의 문장들에 홀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마저 일게 했다. 영화 <오펜하이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킬리언 머피(내게는 넷플릭스의 명작 '피키 블라인더스'의 주인공으로 더 각인된)가 출연했던 동명의 영화를 보지 못한 것에 후회가 막급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지 못한 채 영화를 봤더라면, 이토록 진한 여운은 없었을 것 같아 한편 다행스럽다.
이 소설을 읽고 그의 다른 소설 두 권을 새로 내 서재에 들였다. 이제 짬을 내어 다시 한 번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영화를 찾아 볼 작정이다. 나머지 두 소설 <맡겨진 소녀>와 <푸른 들판을 걷다>도 비슷한 순서로 읽고 말이다. 차기작을 기다리게 하는 소설가를 새롭게 알게 되어 개인적으로 기쁘다. -richb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