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독서가 옆에서 책읽어주다가 베스트셀러 작가된 소년

혼독 - 혼자라면, 읽을 때다 23

by 리치보이 richboy

2부. 혼자라면, 읽을 때다



23. 병상에서 꿈을 이룬 환자의 혼독


- 눈이 멀어버린 지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그의 옆에서 책을 읽어준 남자 알베르토 망구엘



선천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눈을 가진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책을 너무 많이 읽어 그만 시력을 잃게 되었다. 그의 시력은 서른 살부터 서서히 약해지다가 쉰여덟 번째 생일을 치른 후에 완전히 실명(失明)하고 말았다. 보르헤스의 실명은 세상을 떠난 영국계 증조부와 조부에게서 약한 시력을 물려받은 예견된 실명이어서 자신도 언젠가는 맹인(盲人)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보르헤스는 80만 권이라는 어마어마한 장서를 보유한 아르헨티나의 국립 독서관 관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그는 평생 책을 통해 즐거움을 추구하는 독자였고, 많은 작품을 남기지도 않았지만 스페인어로 작품을 쓰는 작가들은 보르헤스의 그늘을 벗어날 수가 없다고 할 정도로 문력이 깊었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보르헤스, 맹인이 예견된 탓에 젊은 시절부터 더더욱 미친 듯이 책을 읽었지만,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을 때까지 자신이 사랑하는 책을 읽고 싶었다.


보르헤스는 보에 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피그말리온 서점의 단골이었는데, 어느 날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저물녘에 피그말리온에 들렀다. 그러고는 점원인 열여섯 소년 알베르토 망구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는데, 자신에게 책을 읽어주던 아흔 줄에 접어든 어머니가 쉬이 지친다면서 달리 할 일이 없으면 저녁에 자신의 아파트로 와서 책을 읽어주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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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을 받아들인 망구엘이 처음 보르헤스의 아파트에 찾아갔을 때, 보르헤스의 문학적 경험들로 이루어진 유구한 시간이 담긴 듯한 그곳은 마치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소년 망구엘은 어두침침하고 소박한 그의 공간에서 보르헤스와 함께 몇 년 동안 정말 많은 책을 읽었다. 소년은 마음 내키는 대로 책을 골랐고, 보르헤스는 소년의 낭독 사이사이에 감탄과 멋진 촌평을 곁들이며 시간을 보냈다. 이후 망구엘은 보르헤스와 함께 한 1964년부터 1968년까지 5년 동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보르헤스와 나누는 대화는 내가 생각하기에 모름지기 대화란 그래야 하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책에 대해 그리고 내가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가들과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들, 또는 확신 없이 직관적으로 얼핏 스쳐갔던 것들을 보르헤스의 목소리로 들으면 그 짙고도 명백한 광채 속에서 그것들은 찬란하게 반짝였다. 기록 같은 건 하지 않았는데, 그와 마주 앉은 저녁 시간이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그는 특히 백과사전을 좋아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국립도서관에 갔을 때, 우연히 펼쳐 든 브리태니커 사전에서 드루이즈 성직자와 드루주파, 드라이든에 대해 알게 되고 나서부터 “백과사전의 질서 정연한 우연에 운을 맡기는 버릇”을 끝끝내 버리지 않았다. 보르헤스는 “있잖니, 눈이 멀지 않은 시늉을 하며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처럼 책을 탐독하고 싶어. 새로 나온 백과사전이 얼마나 갖고 싶은지 몰라.”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래서 망구엘도 보르헤스에게 수없이 다양한 백과사전을 읽어주었다.


망구엘이 마지막으로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준 건 1968년이었다. 5년 동안 거장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어느덧 스무 살이 된 망구엘은 보르헤스에게 ‘책 읽어주는 남자’가 된 덕분에 이전보다 더 독서에 탐닉하게 되었다. 정신적으로 성숙해짐은 물론, 책과 글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나중에는 망구엘 역시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독서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망구엘이 쓴 <독서의 역사>는 현재까지 32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프랑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메디치 상을 수상했다. 또 그 밖의 저서로는 <거울 숲 속으로: 단어와 세계에 대한 에세이>, <나의 그림 읽기>, <외국에서 온 소식>, <독서 일기>, <밤의 도서관> 등이 있는데, 세대를 나서도 그의 책들은 30여 개의 언어로 번역 출간되며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다. 망구엘이 자신이 지은 여러 책에서 밝히고 있듯이 보르헤스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중 하나였고, 인생의 멘토였다. 책 읽어주는 남자 망구엘과 소리로 책을 읽은 보르헤스, 이들에게는 ‘독서는 즐거움 그 자체이며, 깊이 있는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나는 낙원이 있다면 그것은 서재 같은 모습일 거라고 생각해 왔다.” 보르헤스가 즐겨하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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