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다가 눈병난 세종이 아버지 몰래 밤을 세워 읽은 책

혼독 - 혼자라면, 읽을 때다 22

by 리치보이 richboy

2부. 혼자라면, 읽을 때다



21. 병상에서 꿈을 이룬 환자의 혼독



- 병중에 누워서도 책을 읽은 세종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제왕이며 성군으로 평가되는 세종대왕은 22세에 왕위에 올랐다. 성품이 어질고 재능이 출중하였으며, 다방면에서 통하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도량이 바다같이 넓고, 학문을 좋아하였고, 서화에 능하였으며, 의지가 굳어서 한번 옳다고 생각한 일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관철하였다. 세종이 이와 같은 탁월한 지도자로 만든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종의 ‘독서’ 능력이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유난히 호기심이 강했다. 그 호기심을 그는 책을 읽으며 충족시켰다.


세종이 얼마나 책을 좋아했는지를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매일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글을 읽는 충녕(세종대왕이 대군에 봉해지기 전 불리던 이름)을 보면서 태종(太宗)은 걱정이 많았다. 행여 충녕의 몸이 상할까 염려하던 차에, 정말로 충녕이 눈병이 나고 말았다. 눈이 퉁퉁 붓고 눈곱, 눈물이 뒤범벅이 되었는데도 충녕이 독서에 몰두하자, 태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내관을 시켜 그의 처소의 책을 모두 치워버리게 했다.


태종의 어령에 따라 충녕은 눈병 낫기만을 기다리며 누워있었지만, 책을 읽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방안을 거닐며 답답해하던 충녕은 병풍 사이에 숨겨져 있던 <구소수 간歐蘇手簡>이란 책을 발견했다. 처소를 치우던 내관의 실수로 병풍에 숨은 책을 미처 보지 못해 그냥 두었던 것이다. 충녕은 말할 수 없이 기뻐하며, 그 책을 품에 안고 외다시피 읽어 내려갔다. <구소수 간(歐蘇手簡)>이라는 책은 중국의 문장가인 구양수(歐陽脩)와 소식(蘇軾)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놓은 책이었다.


충녕은 이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던지 그가 병석에서 일어날 무렵엔 책이 너덜너덜 해져 있었다고 한다. 세종은 워낙 약한 체질이었는데, 그 이유에 대해 독서해서 병약해졌다고 했는데, 이 일화만 보더라도 세종이 병약한 체질임에도 독서를 즐겼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세종의 독서법은 읽은 책을 거듭해서 읽은 일화에서처럼 ‘백독 백습(百讀百習)’ 즉, ‘100번 읽고 100번 쓰기’였다. 세종의 백독 백습은 책 속에 있는 지식을 완전히 습득하기 위한 방법으로, 독서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같은 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을 저절로 깨우친다는 뜻의 ‘독서백편 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말이 있듯이, 실제로 세종은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 할지라도 반복해서 읽으며 완전히 이해했고, 이렇게 반복해서 읽는 방법으로 많은 지식을 자기의 피가 되고 살이 되게 했다.


이 같은 세종의 독서사랑은 왕위에 오른 후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집현전은 나라의 학문 발전을 위해 궁중에 설치한 일종의 학문 연구 기관으로 젊고 유능한 선비를 선발해서 오로지 독서와 연구에 전념하게 했다. 세종은 이들 집현전 학사들을 무척이나 존중하고 아껴서, 아침저녁으로 식사 자리를 함께 마련하며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기도 했다.


세종은 역대 어느 왕보다도 ‘독서의 유익함’을 잘 알고 있는 왕이었다. 나라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나라의 관리들이 먼저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독서를 중시하는 세종의 이런 태도가 그대로 반영된 정책이 있는데, 바로 ‘독서 휴가 제도’이다. 세종은 ‘사가독서(賜暇讀書)’라는 일종의 독서 휴가 제도를 실시하였다. 집현전에 소속된 재능 있는 신하들이 낮에는 조정 업무에 쫓기고, 밤에는 숙직 때문에 학문에 전념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이들에게 일정 기간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몰두하게 한 것이 ‘사가독서’이다. 처음에는 가자 자기의 집에서 독서하게 하였으나, 방문객들로 인하여 방해를 받자, 나중에는 아예 조용한 산속으로 거처를 옮겨 독서하게 하였다. 제1차로 이런 혜택을 누린 사람은 박팽년, 신숙주, 이개, 성삼문, 하위지, 이석형 등 6명이었다.


사가독서는 훗날 ‘독서당(讀書堂)‘으로 발전했다. 독서당은 국가의 중요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하여 세운 전문 독서 연구 기구로 이 독서당 제도를 통해 유명한 정치가, 학자 등이 많이 배출되었다. 독서당은 나라의 중요한 인재가 길러지는 곳인 만큼 역대 왕들의 독서당에 대한 총애 역시 지극했다.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널리 책을 읽어 이치를 깨닫고 마음을 바로잡아야 치국과 평천하의 효과를 낼 수 있다. 구리로 글자를 만들어 서적을 인쇄해 널리 퍼뜨리면 그 이로움이 끝이 없을 것이다.”



태종은 인쇄 활자의 개발에 대한 의지를 유언처럼 남겨 세종에게는 남겨진 숙원사업이었다. 세종 역시 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많은 책을 만들기 위해 인쇄 활자를 개발하는 일에 착수했다. 활자의 재료가 되는 구리와 쇠, 그리고 기술자의 부족이라는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계미자, 경자자, 갑인자’ 등 활자를 만들어 출판 중흥을 가능케 하였다. 백성들의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하기 위한 <삼강행실도>,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을 일깨우기 위해 역대 효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효행록>, 농사짓는 법을 익혀 실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한 <녹사 직설>은 그때 편찬되었다.


하지만 세종은 책을 대할 때마다 ‘이렇게 좋은 내용을 백성과 함께 나눌 수는 없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남았다. 이러한 세종의 마음이 ‘훈민정음’이라는 민족 문화의 최대 걸작품을 낳았다.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자기의 뜻을 능히 펼치지 못하는 사람이 많도다. 내가 이것을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사용하여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이 창제됨으로써 이제 ‘어리석은 백성’도 쉽게 글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훈민정음이라는 위대한 결과물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어린 충녕 시절부터 책을 좋아해 가까이하고, 병들어 고단한 가운데서도 책을 놓지 않았던 덕분이다. 또한 혼자만 읽고 즐긴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도 독서를 장려하고, 끊임없이 책을 통하여 배우기를 멈추지 않은 땀의 결실이 훈민정음 창제의 기틀이 되었다. 세종 시대가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로 불릴 만큼 나라가 부강해지고 수많은 문화유산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결국 ‘독서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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