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아이도 잠든 밤이었다.
막 시작한 중개사 시험공부에 열중해 있어야 할 때, 나는 TV에 꽂혀 있었다. 화면 절반은 회의장으로 들어가려는 완전무장한 특전사 군인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맨손의 평상복을 입은 시민으로 뒤엉켜 있었고, 나머지 절반의 화면에는 계엄해제 의결안을 놓고 하나 둘 씩 회의장으로 들어오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이었다.
느닷없이 선포된 비상계엄령이 있고 난 한시간 무렵인데 회의장에 의원들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비상계엄이 있을 걸 알고 기다리고 있지 않고서야 과반을 넘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헬기 두 대로 옮겨진 뒤 군인들의 숫자가 저항하는 시민들의 그것을 능가했고 현관 이외의 출입처를 찾기 위해 부쩍 분주하게 소대들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인들이 바쁘게 뛰어다닐수록 시민들의 우려된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나의 심장도 점점 빨라졌다. 반면 회의장 안 빈공간은 점점 크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 '의원 수가 과반이 넘었다'는 소식과 함께 화면은 통째로 국회를 비췄다. "빨리 의결 안하고 뭐 하냐!", "거수로라도 하자" 는 목소리는 여기저기서 크게 들렸고, "거의 다 됐다, 이럴수록 과정이 철저하고 투명해야 한다."고 국회의장은 거듭 말했다. 마침내 비상계엄 해제의결이 시작되었다. 의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투표소로 향할 때 나도 함께 움직였고, 그들이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넣을 때, 나도 함께 투표했다.
진실의 순간이란 '사람과 사람이 한 마음이 되는 순간'을 말한다. 마케팅 용어로 쓰이는 이 말의 어원은 스페인에서 비롯되었는데, 'Moment De La Verdad' 라고 해서 투우 중에 투우사가 황소의 급소에 '칼을 꽂는 찰나의 순간', 투우사와 관중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말한다. 다시 말해, '절대로 실패하면 안 되는 중요한 순간'을 뜻한다.
지금 생각해도 절대 가능할 리가 없는(심지어 내란세력조차 상상하지 못한) '국회의원의 과반 출석'은 국민을어리둥절하게 했다. 회기 중이라 지역구가 아닌 수도권에 집결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도 '저녁이 있는 삶'이 있었을 터 였다. 또한 국회소집이 다름 아닌 '비상계엄령'이 아니었던가. 야당의 국회의원 입장에서 국회의사당 출석은 호랑이 굴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것도 등원을 저지하는 경찰들을 무릅쓰고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다.
그런 모습을 두 시간 넘게 TV를 통해 지켜본 국민들은 의원들과 함께 가슴졸이고, 격하게 뛰는 심장으로 비상계엄 해제결의를 지켜 봤다. 그리고 그 순간 의원들의 투표하는 손은, 바로 국민들의 손이었다. 그 때가 바로 '진실의 순간'이었다.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은 순간, 가능하게 만든 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국민의 대표였기 때문이었다.
그 날이 있은 후 반 년이 지났다.
진실의 순간이 있은 이후 나와 친구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많은 것이 변했다. 국민은 국회의원들을 시켜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대통령은 일반인으로 되돌리고, 열흘 남짓 이후 새로운 대통령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다시 한 번 진실의 순간을 맛볼 차례다. 12월 3일 국민을 대신해 국회의원들이 비상계엄령을 해제시켰다면, 오는 6월 3일에는 내가, 그리고 친구 자네가 국민을 대신해 새로운 대통령을 뽑을 차례다.
지난 3년간 특히 하루가 1년 같았던 지난 6개월 동안 나를 괴롭힌 수많은 범죄와 악행, 그리고 작당과 수작들을 뿔난 황소로 보고 투우사가 되어 나의 소중한 한 표로써 그들의 급소를 찔러 무찌를 것이다.
친구, 자네도 12월 3일 그날의 밤을 기억하며 소중한 한 표에 꼭 참여하기를. -richb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