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많이 읽는 편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부족하다고 느낀다(그래서 내 서재의 이름은 식결재, 부족함을 아는 서재이다). 그래서 어쩌면 아예 읽는 시도조차 하지 않아서 '책 읽는 세계'를 몰랐다면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러면 차라리 속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아예 책을 읽지 않는다면 한 달에 이삼십여만 원의 책값을 쓰지 않아도 되고, 적잖은 시간이 남을 것 같다. 무엇보다 '책을 사들였으면 그만큼은 버려라'는 아내의 퉁을 듣지 않아서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나'를 찾지 못할 것 같아서 안 되겠다. 내게 '책을 읽는 시간'은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많이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아는 바를 잘 말하는 것이고, 머리속에 쌓인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그 지식을 세상에 풀어놓는 일이다. 그럴려면 '고백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하다.
나를 발견하려면 나를 마치 해부를 하듯 잘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려면 어떤 나이든 모습을 발견하면 인정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나란 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용기'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했다. 당시의 말을 해석하면 '용기 있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만큼 '나'를 아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점에서 용기 있는 자는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자신감 自信感 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니까.
세상을 살면서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중요하다.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함을 알리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문 방송을 보고 참여자들이 웃고 떠들며 말하는 것을 들었다가 따라서 말하는 건, '앵무새'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내 생각에서 비롯된 의견을 낼 줄 알아야 하고 주장해야 한다. 그럴려면 많은 사실을 주워담고 나름대로 시시비비를 가리고 그 속에서 내가 생각하는 '무엇'에 대해 이야기 할 줄 알아야 한다. 물론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고, 그로 인해서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럴 때 그 비판을 들어 찾아보고 내가 틀렸다면 인정하고,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때도 필요한 것은 '용기'다. 그러면서 나는 단단해진다.
남들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 나대로 생각하고 살 일이다.
행동하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 생각한 대로 살아갈 일이다.
그래서 나 답게 살아야 한다.
나 답게 살 때 비로소 '내가 잘 살고 있는가' 고민하는 게 의미가 있다. -richb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