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상원의원 벤 새스는 책 <사라지는 미국어른>에서 먼 과거의 사람이 현사 사회를 봤을 때 어떤 점을 가장 이상하게 여길지 생각해 보았다. 그는 각종 기술 발전을 제외하면 극심한 연령차별에 주목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대부분 같은 또래의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다.
아이들은 또래 아이들과 함게 학교에 다닌다. 부모이 우리는 비슷한 다른 어른들과 함께 일한다. 우리의 부모와 조부모는 은퇴자 커뮤니티나 양로원, 유람선으로 밀려난다.
당신과 나이가 두 배 많은 사람과 미지막으로 한 지붕 아래서 있어본 적이 언제인가? 당신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자란 사람들과 당신은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눠 보았는가?
로리 매케나의 노래 "험블 앤드 카인드"에서 그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할아버지를" 만나러 간느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실 당신의 가족으로 만나러 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녀가 풍선 안에 갇혀 다른 어린이들 외에는 만나지 않는 삶을 사게 해선 안 된다.
그 대산 아이들에게 현인을 만나게 해주자. 인간이 과거와 근래에 저지른 나쁜 일과 좋은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자. 고통스러운 교훈을 얻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고 대단한 일을 성취한 사람들도 만나게 해 주자.
그렇지 않으면 이 모든 지혜를 잃을 수 있고, 당신의 아이들은 그 지혜를 얻지 못할 수 있다.
<<데일리 대드, 라이언 홀리데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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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모가 비교적 일찍 돌아가신 탓에 연로한 장인어른을 '아버지'로 여기고 살았다. 장인어른은 20년 전 밤사이 심장마비로 먼저 간 아내가 그리워 술에 취해 살다가 넘어져 혀를 잃어버린 '로맨티스트'였다. 나이 80이 넘어서도 소주 1병을 거뜬히 비울 만큼 건강하셨던 장인이었지만, 코로나 사태로 친구들을 모두 잃고 외로워 하다 자신도 결국 '치매'에 걸려 3년여를 해맑게(?) 살다가 곱게 돌아가셨다.
사회가 갈수록 각박해지는 건 '핵가족화'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대가족이었을 때는 가족 자체가 하나의 사회였던 터라 집안에서 일어나는 왠만한 일은 집안에서 해결되었다. 아이가 어디서 두들겨 맞고 오면 제 삼촌이 런닝바람으로 쓰레빠 신고 나가 해결해 줬고, 아이가 학교에서 사고를 치면 할머니가 대신 학교에 가서 새파란 선생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식구끼리 미운정 고운정이 쌓이고 쌓인 덕분에 어지간해서는 '헤어진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오래 전 부모와 아이가 하루 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채 10분이 안 된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시간이 꽤 흘렀으니 지금은 몇 분이가 될까, 설마 1시간으로 늘어난 건 아닐까. 부모와 자식 간 사이가 이럴진대 무슨 조부모를 떠올릴까 싶다. 이러한 괴리가 조금만 나이먹은 테를 내면 '꼰대' 소리를 듣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유대교에서는 노인을 일러 '걸어다니는 도서관walking library'라 했다. 산전 수전 공중전을 모두 겪으며 오래 살다 보면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인데?' 하는 기시감을 만나게 된다. 바로 역사가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자녀교육에 있어 부모조차 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있다. 만약 장인이 살아계셨다면 아이를 위해 한자공부와 바둑, 그리고 신문 함께 읽기를 부탁했을 것 같다. 이보다 확실한 외주가 어디있을까. -richb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