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탕해도 재밌다
시청자들은 영드라면 넷플릭스의 <블랙 미러>는 많이 알고 계실 것이다. 워낙 블랙미러는 넷플릭스에서 유명하고 심오한 주제와 몰입 있는 연출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영국 기반의 컨텐츠의 코미디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 공개된 <에놀라 홈즈>부터 <미란다>까지 영국 컨텐츠를 사랑하는 나도 데리 걸스는 처음 들어 생소했다. 하지만 이미 대박적인 영국 시트콤 미란다를 애청했던 나로서는 데리 걸스가 보여줄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리고 나는 20분 러닝타임의 어이없고 매력 쩌는 시트콤에 빠져 심지어 재탕하기에 이르렀다.
TV에서는 볼 수 없는 매력적인 넷플릭스 컨텐츠를 맛있게 뜯고 즐기며 그 작품들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넷플릭스 컨텐츠 후기를 글로 풀어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넷플릭스 스토리텔러 작가'를 구한다는 포스팅을 읽고 본격적으로 글감을 생각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건 최근까지 애청한 '데리 걸스'였다. 영국 컨텐츠를 사랑하는 나는 참새 방앗간 들르듯 데리걸스를 찜한 콘텐츠 목록에 무의식적으로 넣어두었다. 하지만 내가 항상 먹던 먹이라기엔 조금 낯설어 보이는 것은 참새도 금방 물 수가 없는 법이라 일단 썸네일과 줄거리 설명부터 읽어보았다.
정치적 혼란이 최고조에 달했던 1990년대의 북아일랜드. 그러거나 말거나 일상이 전쟁인 고등학생들이 있다. 말썽이라면 전교 1등인 다섯 친구들. 부디 오늘만 무사하자.
(넷플릭스 데리걸스 줄거리)
'뭐야, 난 미국 하이스쿨 재질의 이야기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90년대 북아일랜드 고등학생 얘기가 재밌을까? 분위기가 좀 살벌하지 않을까.'
넷플릭스는 재밌는 컨텐츠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플랫폼이니까 그리 고민하지 않고 다른 영상들 좀 보다가 첫 화를 통해 무심코 들어간 '데리'의 세계는 너무 매력적이었다.
우리에겐 조금 낯선 배우인 시얼샤 모니카 잭슨이 연기하는 에린 퀸은 정말 압도적인 표정연기를 선보이는데 그의 안면 근육이 살아 움직이는 연기를 본다면 누구나 에린에 빠지게 될 것이다.
에린과 올라는 사촌지간인데 올라는 에린의 일기장을 학교에서 낭독한다든지 등 에린을 창의적인 방법으로 골탕을 먹인다. 그 둘의 '톰과 제리' 관계성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미쉘은 성격이 굉장히 털털하고 하는 말의 반은 욕이다. 클레어는 항상 freak out 한 상태로 뭐든지 불안해하며 난리를 치고 제임스는 영국인이라고 온동네 데리 사람들에게 욕을 한바가지를 먹는 캐릭터다.
에린의 집엔 3대가 모여산다. 조부모-부모-나 이렇게가 아니라 이모와 사촌에 새로 태어난 갓난아기 동생까지 정말 복작복작한, 혼란의 카오스인 집안이다. 90년대 배경이라 집안 가구들도 앤틱하고 빈티지 해서 보는 맛이 있는데 그 공간에선 우아하지 않은 일만 일어난다. 주로 등교를 준비하는 장면부터 드라마가 시작하는데, 한 가지 일이 생기면 모두가 한마디씩 얻는 등 사생활 따윈 없는 고등학생의 삶이 웃프지만 재밌게 표현된다. 가장 중요한 사춘기 시기에 개인 공간이 없는 에린의 기본 표정이 환멸인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
이 집안의 구성원은 집안에서 맨날 담배 피우는 엉뚱한 이모, 항상 창의적이고 참신한 협박 및 훈계를 하는 엄마, 맨날 할아버지한테 구박받는 아빠 등 이 집안에선 누구 하나 조용한 인물이 없고 각자 개성이 아주 뚜렷하다. 이 사람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끝을 올리는 북아일랜드식 발음인데, 영국식 발음과는 다른 중독적인 매력이 있다. 특히 이모의 엉뚱함을 더욱 살리는 요소가 되어준다.
이 많은 개성있는 등장 인물 중에 가장 매력이 독보적인 건 단연 시스터 마이클이다. 집안에서 에린을 잡는게 엄마라면, 학교에서 에린과 친구들을 컨트롤(?)하는 건 학장 격 역할을 맡고 있는 시스터 마이클 수녀님이다. 사실 이 드라마에서 그가 나오는 장면은 굉장히 짧다. 하지만 데리 걸스를 본 후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시스터 마이클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베스트신 모음영상에 '시스터 마이클이 나온 모든 장면이 베스트'라는 댓글이 달릴 만큼 짧지만 강력한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누구나 이런 스타일의 엄한 호랭이 선생님은 있었지만 마이클은 그에 더해 솔직함과 매력을 얹어 극대화한 캐릭터다. 살다보면 시스터 마이클처럼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싶고 표정도 맘대로 구기면서 살고 싶은데, 그를 보면서 대리 만족하고 통쾌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열광하는게 아닐까. 수녀님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를 깨부수는 인물이라서 그 반전의 매력도 한 몫 더한다.
"(음치 학생들의 공연을 보고)저 노래 (이미 긴) 금지 리스트에 올려두세요."
"노래를 듣고 있다보니 이 노랠 부른 가수들이 얼마나 잘하는지 깨닫게 되는구나."
"안전상 제임스가 우리 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제임스는 영국인이거든."
"드라마 15분 뒤에 시작하니까 빨리 빨리 끝내죠."
에린 무리들이 수녀님이 아주 아끼는 예수상의 머리를 두동강 내는 등 뭐든 사건이 터지면 불려가는 대상은 시스터 마이클이라 매 회마다 어떻게 혼나는지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사고 치러 갈 때 버스에서 딱 마주치는 것도 그여서 항상 숨기고 싶을 때 가장 무서운 선생님에게 들키는 건 아일랜드나 여기나 지구상 어디서나 똑같은 듯하다.
일상에서 일어나지 않는 주제를 접할 때의 호기심과 그 세상을 한 번 살아보는 대리 경험으로 우리는 좀비물이나 스릴러 같은 영상을 굳이 내 경험과 겹쳐 볼 수 없어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코미디는 문화를 바탕에 둔 웃음코드가 맞지 않으면 그 순간 등장인물과 나는 분리된다. 실제로 영국 코미디 IT 클라우드가 나에게는 그랬다. 10년 이상 지난 드라마이기도 해서 나에겐 낯설었다.
하지만 최근에 제작된 데리 걸스는 시간적 배경이 90년대에 공간이 북아일랜드여도 공감하고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누구나 겪었을 법한 일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에린이 엄마한테 시시콜콜한 이유로 혼나고 항상 친구랑 몰려다니며 크고 작은 말썽을 부리는 것, 학창시절 한 번쯤은 봤을법한 호랭이 선생님 등 낯설게 느껴진 곳데리에서 느꼈던 공감으로 어느 나라, 어느 문화든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학창시절 겪는 일은 크게 보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girl을 '갤'로 발음하는 데리 사람들의 특이하지만 매력있는 발음을 들으며 그들과 함께 웃다보면 90년대 북아일랜드라는 먼 그곳에서 생각지 못한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데리걸스는 시즌 2까지 넷플릭스에 있으며 현재 시즌3은 확정되었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아직 방영날짜는 미정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