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치레몬 Sep 05. 2019

배드민턴

어느 주말 늦은 오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 중 하나는 바로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운동을 나가는 주말의 늦은 오후이다. 비록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된다는 과제를 앞둔 일요일 이른 저녁일때가 태반이라는 것이 함정이지만. 이제 그 정도는 웃으며 맞아야 20년차가 가까워지는 노련한 직장인 아니겠는가.


 함께 살아오면서 시기별로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언제나 꾸준하게 운동을 지속해온 남편과, 움직이라고 하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를 천성적으로 싫어하는 나는 여가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참 많이 다르다. 나이가 들수록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이 나는 정말 몸으로 하는 일을 싫어한다는 것인데, 따라서 아이들과 몸으로 놀아주는것 또한 역시 거의 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에너지가 만빵인 아이들이 밖에서 하는 활동을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주 5일을 보내고 물먹은 솜처럼 잔뜩 늘어져있는 엄마보다는 여러 운동을 좋아하는아빠와 운동을 하러가곤 한다. 한여름 더위를 피해서 이른 오전이나 늦은 오후에 캐치볼이나 배드민턴을 하는 식이다.





 지난 주말, 둘째가 간절하게 부탁을 했다. 누나와 배드민턴을 하러 가기로 했는데, 엄마가 따라와서 그걸 봐주기만 하면 안되냐는 것이다. 그간 아이들이 운동하는 모습이 궁금하긴 했지만, 남편과 아이들이 함께 나간 짧은 시간동안 누리는 혼자만의 휴식이 어찌나 달콤하던지, 사실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평일 낮에는 직장에서, 그 외 시간에는 가정에서,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 있어 혼자있는 시간이 거의 없는 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또는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는, 일주일에 고작 한 시간 남짓의 자유가 매우 소중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는 성향의 둘째는 그날따라 매우 집요했고, 마침내 나는 백기를 들고 따라나서기에 이른다. 둘이 배드민턴을 치는 모습을 보니 그간 방과후 학교의 배드민턴 교실에 보낸 보람이 있을만큼, 제법 잘 치는 것 같다.






 배드민턴 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참 재미있게 시합을 하는가 싶더니 둘째는 더하고 싶은데 첫째는 그만하고 싶다며, 짜증과 징징거림이 뒤섞인 이견을 주고받다가 순식간에 분위기가 나빠졌다. 보다 못해 '엄마는 못 치지만 한 번 쳐볼까?' 했더니 반색하는 둘째.

 스스로 운동 신경이 대단히 뛰어나진 않아도 평균 이상은 되지 않나, 라는 나름 탄탄한(?) 자의식과는 별개로 학창시절에 다른 건 몰라도 '특히 배드민턴은' 못 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서브를 넣는 것은 어려웠고, 공이 나에게 올 때 제대로 받아내는 것도 정확하지 않았다.

 따라서 애초에 '엄마는 배드민턴을 못 친다'고 여러 번 얘기했고 그게 진심이긴 했는데, 몇 십 년만에 갑자기 라켓을 휘두를 가상한 용기가 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 후 남편과 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알게 된 잊어버리고 있던 진실, 신혼 초에 남편과 배드민턴을 치다가 내가 너무 못 쳐서 스스로 화를 낸 이후, 다시는 치지 않았다고 한다)






 가뜩이나 못 치는데 기억도 못할 만큼 까마득한 시간이 지나 다시 잡은 라켓, 그런데 못 쳐도 상관없다는 생각하고 편하게 마음대로 하니 '어라, 의외로 몇 번 주고 받기가 되네?' 지켜보던 가족들이 아주 못 치는 건 아니네, 하며 앞으로 나를 계속 데려가기 위한 밑작업을 하였다.

 시원한 바람이 살랑 불어 선선한 주말 저녁, 아이들과 배드민턴을 치거나 뒤에 앉아 지켜보는 일은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물론 직접 치는 것보다 구경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만. 알지 못하던 작은 재미를 알게 된 것도, 가족들과 새로운 무언가를 함께한다는 것도 기분좋은 포인트였다.

 둘째가 '엄마도 아빠처럼 운동을 해서 건강해져야지. 근육도 키워야하고'라고 말하는 것도 참으로 귀여웠다. 물론 이후에 엄마가 너무 못 쳐서 별로 재미가 없다는 혹평을 듣기도 했지만 말이다. 집에 돌아와서 '아뿔싸, 이제 혼자 보내는 그 짧은 시간조차 사수하기 쉽지 않겠구나!'라는 엄청난 사실을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는 것은 엄마만의 비밀로 해두고자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직도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