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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치레몬 Mar 01. 2021

아직도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

화내지 않는 성숙한 어른으로 살기


얼마 전 팀원들과 회식 중에 있었던 일이다. 5명 이상 집합 금지 지침에 따라 4명이 함께 점심을 했는데, 곧 회사를 떠나는 팀원이 있어 송별회 겸 해서 모인 자리였다.



오래간만에 같이 하는 식사였다. 시종일관 차분하지만 나름대로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퇴사 예정인 팀원이 문득 내 얼굴을 살피더니 이렇게 말한다.



"팀장님, 이런 거 여쭤봐도 될는지 모르겠는데..."

(어서 얘기하라는 나의 제스처가 있었고)


"며칠 전에 휴게실에서 통화하시는 소리를 언뜻 들었어요.

많이 화나신 것 같던데 무슨 일이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마도 얼굴은 약간 붉어졌을 것이다. 팀원이 묻기 전에도 이미 '그 일'을 많이 후회하고 있었다. 내가 그때 남들이 다 들을 정도로 엄청나게 화를 낸 것이 맞기는 하구나 하며 아차 싶었다.



풀타임 워킹맘으로 일하며 아이 둘을 키우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회사에 있을 때 집안일로 통화할 건이 많이 생긴다. 학교, 학원에서 오는 각종 메시지와 어플만 해도 엄청나고 - 코로나로 등교가 뜸해지면서 엄마가 받는 연락의 절대 개수는 더 늘어났다고 확신한다 - 아이들과 커뮤니케이션할 일도 계속 있다.



아이들이 자라도, 또 아무리 스스로 '비교적' 잘 챙기는 편이라고는 해도 시기와 상황에 따라 엄마만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이제는 카카오톡으로 가장 많이 연락을 주고받는데, 메시지만으로도 소통이 어려우면 통화가 필요하기도 하다.






하루 종일 직장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 코로나로 외근도 아주 많이 줄었다 - 어려운 점 중의 하나는 바로 '편하게 통화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조용한 실내에서 사적인 내용의 통화를 하지 않는 분위기여서, 짧게 끝낼 수 있는 용건이 아니면 원활한 전화 한 통 하기가 일종의 미션이 된다.



사무실 바로 옆에 있는 오픈된 작은 휴게 공간에서 전화하거나, 아니면 빈 회의실이 있는지 확인하고 들어가서 오가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통화를 해야 한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 그리고 '개인적인 일을 알리는 것', 둘 다를 매우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오랫동안 회사를 다니며 전화 통화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는 굳이 나열할 필요가 없겠다. 원래 통화를 선호하지 않기도 하고, 이제는 전화보다는 텍스트로 연락하는 경우가 더 많기에 그럭저럭 지내고 있었다.






팀원이 물어봤던 그 '사건'은 바로 12살, 초등학교 5학년이 된 둘째 아들과의 전화 통화였다.



한동안 아들을 영어 학원에 보내지 않다가, 이제는 좀 가야 할 것 같아서 학원을 보내기로 했다. 학원 라이딩을 할 수 없는 직장맘이고, 아들이 아직 어리다는 생각에 셔틀버스를 타야 하는 거리가 있는 곳은 처음부터 제외였다.



집에서 도보 5분 이내 거리의 학원을 알아보고 아들과 함께 다녀왔다. 집과 학원은 가까운 거리이고, 우리가 사는 아파트 단지를 1-2분만 걸어 나오면 바로 그 학원이 있는 큰 건물이 대로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학원 등록을 위해 함께 다녀오며 길을 알겠냐고 아들에게 재차 물어봤고, 아들은 알겠다고 했다. 평소 방향 감각이 뛰어난 편은 아니라 정말 길을 아는 건지 살포시 의심이 들었으나(...), 길을 잃으려고 해도 힘든 위치인지라 어떻게든 찾아가겠지 싶었다.






영어 학원에 가는 첫날. 수업 시작 5분 전에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어떻게 가야 해?"



5분 거리라고는 해도 분명히 수업 시작 10분 전에 집에서 출발하라고 일러뒀는데, 5분 전에 나가는 모습에 더하여, 가까운 길도 찾지 못해서 전화하는 모습에 곧바로 짜증이 났다.



사무실 책상 앞자리에 앉아 지금 있는 위치를 물어보고 길을 알려 주었다. 늘 그렇듯 조용조용 대꾸하다 보니, 게다가 코로나로 마스크를 쓰고 조용히 말하려니 길에 있던 아들 - 게다가 그 날은 유독 바람이 쌩쌩 부는 날이었다 - 은 잘 들리지 않았나 보다.



뭐라고?

엄마, 안 들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니까.

어떻게 가라는 거야?

거기가 어디지?

잘 모르겠어,

안 보여!!!



와 같은 대답이 이어지며, 답답해서 도저히 더 이상 자리에서 통화를 할 수 없었던 나는 벌떡 일어나서 바로 옆 휴게실로 갔다. 휴게실에서도 마스크를 벗을 수가 없기에 처음에 어쩔 수 없이 높였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더불어 마음속의 화도 점점 불같이 일어났다.



길을 알려주고 가 보라고 전화를 끊었다가, 다시 했다가, 문자를 보냈다가, 다시 통화를 했다가, 이걸 또 반복했다가, 결국은 집에 있는 큰딸에게 바로 나가서 동생 길을 알려주라고 SOS를 요청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새 얼마나 큰소리로 아들에게 폭풍 버럭을 계속했는지는 매우 구차하므로 적기 어려울 것 같다...... 휴게 공간이기에 사람들이 오가는 것은 당연히 알았지만, 나의 분노가 그대로 울려 퍼져(...) 사무실 내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들릴 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화가 났었다.






결국 헤매던 아들은 누나의 도움을 받기 전에 길을 찾아 지각하긴 했지만 학원에 잘 도착했다. 자리에 돌아와 상황이 종료(?)되고 나니 문득 후회와 자괴감이 몰려왔다.



냉정히 생각하면 길을 잃기도 어려운 위치였고, 어차피 어떻게든 갈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바쁜 오후 시간, 사적인 통화가 곤란한 사무실, 초행길인데도 늦게 출발하는 아들의 무신경함과 길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는 부주의함, 마스크와 강풍으로 야외에서의 전화 통화가 원활하지 않은 상황, 그 모든 것이 삼단 사단 콤보가 되어 예민한 신경을 단단히 긁었던 것 같다.



그렇게 화낼 일은 아니었다고 자책하며 근무 시간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집에 가서 아들에게 뭐라고 말할까 고민하며 퇴근했다. 저녁에 아들과 만나 앞으로는 무조건 10분 전에 출발할 것 그리고 길을 모르면 미리 확인할 것을 당부했다.



늘 그렇듯 나와는 다른 차원의 인류인 아들의 대답은 간결했다. "애가 그럴 수도 있지!"



......






아들과 통화하며 화를 냈던 그 날에 이어 팀원의 질문은 그렇지 않아도 때로 자책하는 습관을 가진 나에게 경종을 울려 주었다.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자.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라면 앞서서 걱정하고 예민하자 반응하지 말자.

후회할 것이라는 생각이 1%라도 들면 잠시 숨을 고르고 화내지 말자.



마지막으로, 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므로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말고

가끔은 화를 내는 모습도 나라는 것을 인정하자.

잘못은 반성하되 너무 관대하거나 너무 엄격하지 말자.



이제는 회사를 떠난, 20대 후반의 비혼족인 전 팀원이 자기 자식에게 고래고래 화를 내던 전 팀장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퇴사할 무렵 들었던 팀장의 화난 목소리 따위는 이미 잊어버렸기를 바랄 뿐이다. ㅜ.ㅜ



사족이지만 작은 위안도 있었다. '아들에게 화를 낸 건 그렇다 치고 조용한 사무실에 널리 울려 퍼진 화난 목소리로 동료들에게 피해를 준 것 같다, 너무 부끄럽다'라고 자책하는 나에게 건넨, 중학생 아들을 키우시는 선배 팀장님의 말이다.



"레몬 팀장, 나는 백번 이해해. 오죽하면 레몬 팀장이 화를 냈겠어. 나는 아들한테 수도 없이 그래, 일상다반사야." 동병상련, 가재는 게 편이라지만 위로가 되었다.



화내지 않는 부모는 물론이고, 제대로 된 성숙한 어른으로 살기가 참 어렵다.






덧붙임)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겨울방학 동안 아들이 가장 열심이었던 종이접기 사진들을 올려본다.



손이 야물다고 할 수는 없는데, 유튜브 동영상을 보며 어려운 종이접기를 따라 만드는 인내심과 끈기, 집중력이 대단하다.



왼쪽: 청룡/ 오른쪽:  드래곤



왼쪽: 기관총/ 오른쪽: 전투기




https://brunch.co.kr/@richlemo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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