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치레몬 Sep 06. 2019

말과 글

그 휘발성에 대하여


얼마 전 TV 채널을 돌리다가 방송인 전현무가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을 잠깐 보게 되었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는데 대략 이런 의미의 우스개 소리를 하였다. '여기저기 나와서 하도 말을 많이 하고 다녔더니, 내가 나왔던 예전 방송을 보면 나도 깜짝 놀라. 내가 언제 저런 말을 했었나 싶어서.'



인기 절정의 예능인과는 다른 맥락이기는 하지만, 나 또한 그의 말에 적극 공감했다. 바로 십 년 가까이 운영했던 네이버 블로그를 최근에 다시 시작하면서, 내가 썼던 오래된 글들을 읽을 때 느끼는 기분과 정확히 일치했다. 2년 만에 돌아온 블로그는 훨씬 보기 좋고 세련된 기능을 자랑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몇 년 전 오늘 글을 편하게 볼 수 있는 메뉴이다.






옛날 글들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대단히 복잡미묘하여 뭐라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가 없다. 야근 많고 경쟁 심한 직장을 다니며 아이 둘을 키우느라고 고생 고생 생고생했던 과거의 내가 참 불쌍하고 안타깝고 기특하기도 하고, 혹시 누가 내 글을 싫어할까 고민하며 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들 수 있는 내용을 적어보려 끄적였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아무 생각없이 미래에 대한 목표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기에 급급했던 - 물론 지금도 젊지만 그보다 더 어렸던 - 지나가버린 시절의 소중함과 허무함에 문득 마음 한 구석에 서늘한 썰물이 밀려오기도 한다. 아이들의 아가아가한 사진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절로 미소를 짓고, 아쉽지만 후회 없는 삶을 보냈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한다.



글은 기록으로 남으니 말보다 더 오래간다고 하지만, 직접 쓴 기록을 읽으며 든 생각은 그 또한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래 전에 쓴 글을 읽으면 약간의 기시감은 있되, 내가 정말 이런 글을 썼던가? 하는 엄청난 의문이 솟구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것을 보면.






그래서일까, 몇 번 겪었던 조금은 난처한 상황이 떠오른다. 블로그와 글을 통해서만 나를 알던 분들을 직접 만나게 되면, "레몬님은 OOO 하시잖아요"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갑자기 머리가 멍해지는 일이 몇 번 있었던 것이다. 



첫번째는 기억력이 그다지 완전하지 못하여, 내가 써 놓고도 무엇을 썼는지 따라서 그분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는 경우이다. 두번째는 분명 내가 제공한 혹은 작성한 정보를 통해 나를 알고 계신데, 그 정보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보니, 애초에 의도한 것이 아닌 다른 의미로 나를 추측하고 예상하는 케이스이다.



더하여 예전엔 글을 통한 오인지 경험이 많았다면, 이제는 기억력이 더욱 떨어지며 내가 방금 말해놓고도 무엇을 얘기했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그 때 했던 말과 지금 하는 말이 좀 달라진다고 무조건 '그건 잘못이야'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는 것도 나이가 들어 조금이나마 유연해지며 겨우 들었던 생각이다. 타인이나 사회에 위해가 될 수 있는 도덕적인 흠결에 대한 이슈가 아니라면, 완벽하지 않은 내가 타인의 완벽을 기대하고 무조건 요구하지는 않는 것이 성숙한 어른의 자세가 아닐까 싶다.



말과 글은 아무리 기록을 해놓는다고 해도 그 주체에 의해 휘발되는 성격이 매우 강하다. 나 혼자 멋대로 상상해서 만든 멋진 성에 마음대로 누군가를 데려다 놓고, 좋아한다는 이유로 갖은 치장을 해줄 필요가 없는 일이다. 아무리 멋진 성이라고 해봤자 남이 만든 틀이고 테두리이고 울타리이다.



그러니까 결론은, 진정 좋아한다면 있는 그대로 볼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 설사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여기까지 쓰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오래된 팝송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I love you just the way you are


매거진의 이전글 글쓰기의 세 가지 좋은 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