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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치레몬 Dec 23. 2020

586세대의 현재

적폐가 되어버린 과거의 운동권




90년대 후반 학번인 내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소위 '운동권' 학생들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학교에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새로운 총학생회가 출범하면 이번 학생회장이 어느 강도의 성향인지, 강성인지 아닌지 정도가 '카더라'로 뒤늦게 들려왔을 뿐이다.



매일 어떤 영화를 볼까 아니면 뭐하고 놀까, 오늘은 과외 가는 날이네, 정도의 가벼운 - 물론 당시에는 나름 진지했지만 - 고민으로 나의 대학 생활은 꽉 차 있었다. 당연히 학생운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어쩌다 누가 같이 가자는 뉘앙스를 풍기면 다음부터는 멀찌감치 피했다.



가끔 있던 큰 규모의 행진 - 여러 대학들이 연합으로 모여서 깃발과 플래카드를 들고 걷는 - 형식의 데모가 있을 때면, 아마도 총학생회의 지령(?)을 받았을 과 대표가 난처한 얼굴로 같이 갈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았던 기억이 있다. 나처럼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한가득했던 과 친구들 중 겨우 몇이 다녀왔을 것이다.



그 흔한 데모에 한 번도 참가한 경험은 없지만, 오랜 세월 진보 성향을 가지고 있던 나는 자신의 시간을 쪼개어 데모를 나가는 일부 친구들에게, 대학 생활 내내 도서관의 오래된 책 냄새보다는 매캐한 최루탄 향기가 더 익숙했다던 한참 선배들에게 일말의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선배 세대를 포함한 전국 각지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우리나라가 이만큼이라도 민주화된 거라고 생각했기에. 부마항쟁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거리로 앞장섰던 젊은 청년들에게, 광주에서 피 흘리며 죽어간 평범한 시민들에게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는 셈이라고 여겨왔기에.






세월이 지났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었다. 한 해 한 해 연차가 쌓여갔다. 이제는 직장에서도 상당히 연차가 높은 축에 속하는 중간 관리자가 되었다.



학연, 지연, 혈연, 흔하다면 흔한 빽 하나 없는 여성이 공무원도 선생님도 대기업도 아닌 사기업 조직에서, 오랜 세월 일하는 것은 솔직히 매우 어려웠고 뭣 같은 일(?)도 많았다, 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으면, 겪어낸 또래의 여성들이 많지 않기에 다른 조건의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무슨 임원씩이나 된 것도 아닌데 어쨌든 한 마디로 그냥 지랄 맞다. 여하튼 생계형 직장인이자 가장으로 살아남아야 했기에 버텼고 또 버티고 있는데...



20년 가까이 일을 하면서 이상한 모습들을 참 여러 번 목격하였다. 대규모 공채로 신입 사원들이 들어오면 그들 중 알려진 것만 삼분의 일, 의 비중으로 부모님(대부분 아버지)이 한가닥 하시는 분들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나 같은 평사원이 아는 수준이 그렇다면, 실제로는 소위 낙하산이 절반은 넘었을까?



요즘 같은 세상에 어쩌면 스펙도 능력이라는 말에 기꺼이 동의한다. 다만 '어쩔 수 없이 타고난' 스펙 - 엄빠빽 -으로 쉽고 편하게(?) 입사를 했으면 보통의 신입사원과 똑같은 능력치를 발휘하는 것이 미덕이거늘... 보통 수준으로만 일을 하면 아무 문제가 없었겠으나, 개 중 일부는 현저히 떨어지는 업무 능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너무나도 힘들게 했다.



열을 가르치면 하나 둘을 알고, 그 하나둘을 열 번 가르쳐야 한다면...... 그들을 끊임없이 보살피고 보좌해야(?) 하는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어찌 자괴감이 들지 않겠는가.






신입사원은 그렇다 치고, 좋은 자리의 경력직도 누구의 가족이라네? 요즘은 대학생들이 방학이면 괜찮은 기업에서 단기 인턴을 하며 스펙을 쌓아야 한다고 하더니, 어디 인턴들은 다 누구 자식이라네?



사회에서 생업을 이어오며 이런 일들을 하도 많이 보다 보니까, 이제는 나조차도 이런 현상에 거의 무뎌져서 어떤 것이 공정한 기회이고 결과인지를 객관적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이 된 것 같다.



미국 유학 - 인턴 경험 - 좋은 기업 입사, 라는 정형화된 루트는 그래도 좀 배웠다는, 한 때 데모 좀 했다는 지식인 586 세대 자녀들의 정형화된 루트라는 것을 현실 체험으로 알고 있었기에, 전 법무장관 부부의 자녀 문제가 불거졌을 때는 데자뷔 그 자체였다.



사실 나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이기에, 자식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 분명 잘못이긴 하지만, 자식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약간 그릇된 선택을 해야 한다면 - 할 수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다만 여기서의 문제는 큰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그 행동이 필연적으로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경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더 실력이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은 좁은 틈을 비집고 판을 엎어버린 낙하산 때문에 취업의 기회를, 입학의 기회를 영영 놓치게 된다.



두 번째는 본인들에게는 그게 당연한 일이고 권리이면서, 남들에게는 결코 허용되는 않는 위법이라는 이다. 대중의 심리까지는 평범한 소시민인 내가 미처 깨달을 수 없지만, 최소한 내가 가장 분노하는 포인트는 바로 이 지점이다. 내로남불. 후안무치.






마음속으로만 말해본다.



부모 빽으로 자식을 취업시키는 것이, 진학을 시키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라고.

낭만을 섞어 이야기하는, 과거 화염병의 추억은 그저 추억일 뿐이라고.

정의와 공정을 위해 싸웠던 그 시절은 오래전 과거일 뿐이고,

지금 당신들의 모습은 당신들이 적폐라 하던 바로 그 적폐들보다 더 하면 더 하다고.



살아남기 위해, 생존을 목표로 기를 쓰고 공부하고 취업해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젊은이들이 보기에는 배부른 라떼에 불과하다고.

진짜 당신들 그렇게 사는 것 아니라고.



오늘의 판결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존중한다.

더 높은 형량이 구형됐어야 했다,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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