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으로 기억한다. 그해 초의 겨울이었는지 말엽이었는지 확실 치 않지만, 나 스스로 '초등학생'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전년 도까진 국민학교 3학년이었으니, 당시 새로운 개념이었던 초등학생 이라는 '직업'에 뭔지 모를 설렘이 있던 터라 1996년이 맞을 것이다. 꽤 추운 날씨였는데 어둑한 저녁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주일 미사를 마친 때였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어머니와 성당을 열심히 다녔다. 일 을 마치곤 종종 '도깨비시장'이라 부르던 곳을 들러, 추울 때 먹으면 기가 막힌 붕어빵이나 어묵 같은 간식을 사주시곤 했다. 그날은 특이 하게 먹거리를 팔지 않는 노점 앞에 섰다. 리어카 같은 바퀴 달린 매 대에는 카세트테이프가 가득했고 스피커로는 당시 유행하던 곡이 흘 러나왔다. 그때만 해도 길거리나 문구점에서 인기가수의 앨범이나 최 신 인기가요 모음집 같은 명칭의 음반을 쉽게 접할 수 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높은 확률로 저작권료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는 불법 제작물이었을 것이다. 당시 우리 집에 있던 음반이라곤 어떤 아저씨 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힌 LP 한 장과 집에서는 한 번도 트는 것 을 본 적이 없는 서태지와 아이들 1집뿐이었던 터라, 매대 앞에 선 어 머니의 모습이 낯설었다. 판매하던 아저씨와 몇 마디를 주고받으시더 니 최신 가요 류의 테이프를 하나 사서 내게 주셨다. 이 글을 쓰면서 당시에 어머니가 왜 그걸 사주셨는지 기억이 났는데, 고학년이 된 기 념으로 노란색 카세트 플레이어를 사주셨던 터라 라디오만 듣고 있던 아들을 위해 무려 전용 음반까지 선물로 챙겨주려 하셨던 것 같다. 아 무튼 신나서 집으로 달려가 참 열심히 들었다. 듣던 와중에 한 곡에 꽂혔고, 그 부분만 테이프가 물리적으로 늘어질만큼 반복해서 들었 다. 그 노래가 패닉의 <달팽이>이다.
어쩌다 그렇게 줄을 섰는지 모르겠는데, 버스에 올라타니 선택할 수 있는 자리가 많았다. 특유의 쭈구리 습성 탓에 '등잔 밑은 어둡겠지'라는 생각으로 앞쪽에 앉았다. 며칠 전 새터에서 낯을 익힌 선배와 동기들이 차례차례 차에 올라탔다. 거기서도 방 잡고 밤새 술 마시며 다음 날 해장까지 하고 집에 갔던 터라, 이번 OT에선 또 얼마나 마실 지 설레여 하고 있는데 우리 학번에서 꽤 주목받던 여학생이 내 옆자 리에 자리를 잡았다. 왜 하필 여기에 앉은건지 혼란스러운데 내게 미 주알고주알 얘기와 질문이 쏟아졌다. 지금이라면 나름의 컨셉를 잡아 능숙하게 답했겠지만, 그땐 새로운 환경과 익숙지 않은 미녀의 등장 에 어리바리하고 있었다. 달리기 시작한 차 안에서 MC 역할을 맡은 04학번 선배가 마이크를 잡고 흥을 돋우더니, 05학번은 한 명씩 나 와서 장기 자랑을 하라고 한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상황이 오기에 눈 을 깔고 있는데, 누가 먼저 해보겠냐는 물음에 옆에 앉은 그녀가 번쩍 손을 들었다. 역시 꽤 진취적인 신여성이구나 생각하는데 느닷없이 나를 찍고는 먼저 시키자고 제안을 한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일어 나 여전히 흔들거리는 통로 중앙에 서서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엔진 의 진동과 내 심장 박동이 거세지며 야유를 한번 듣고 노래를 시작했 다. 첫 소절이 나오자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차분해졌고, 옆 에서 마이크를 잡은 날 큰 눈망울로 올려다보던 그녀의 시선은 창밖 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티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내게 말 한마디 건네 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을 때 부른 노래는 패닉의 <달팽이>였다.
2026.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