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도 자격이 필요한걸까?

백지의 공포를 이겨내는 법

by 부자마녀

빈 화면을 두 시간 동안 쳐다본 적이 있다. 커서만 깜빡였다.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글을 써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내가 쓴 글을 내가 믿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무슨 책이야.'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책을 쓰는 사람은 뭔가 완성된 사람 같았고, 나는 아직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 사람 같았다. 그래서 쓰지 못했다. 쓰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쓸 자격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자격이라는 게 참 우스웠다. 누가 정해준 기준도 아닌데 스스로를 그 틀 안에 가둬놓고 있었다.


언제부터 '자격'이라는 말에 이렇게 민감해졌을까?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 화가 자격증을 요구받지 않는다. 노래할 때 성악과 졸업장을 확인받지도 않는다. 어른이 되면서 모든 일에 자격을 묻기 시작한다. 마치 세상이 우리를 심사하고 있다는 듯이, 마치 우리의 모든 행동에 허가서가 필요하다는 듯이 말이다.


글을 쓸 때 이 자격 콤플렉스는 유독 심하다.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닌데, 문학상을 받은 것도 아닌데, 심지어 국어를 전공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감히 글을 쓴다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이 얼어붙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매일 카톡을 치고, 이메일을 보내고, 일기를 쓰지 않는가? 그것도 글쓰기다. 단지 그 연장선에서 좀 더 긴 글을 쓰는 것뿐인데, 왜 갑자기 자격을 따져야 할까?


"그렇다고 안 쓸 거야?"

어느날 문득, 떠오른 한 마디.

내가 살아온 40여 년의 시간들, 내가 책을 읽으며 밑줄 그은 문장들, 내가 실패하고 깨지면서 배운 것들, 내가 사랑하고 미워하면서 느낀 것들. 이 모든 것들을 정리도 못 해보고 사라지게 둘 건가? 그건 너무 억울했다. 마치 평생 모은 보물을 상자에 넣어둔 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하고 죽는 것 같았다.


그래서 썼다. 어설퍼도 썼다. 틀려도 썼다. 그냥 썼다. 처음에는 한 문단도 채우기 어려웠다. 쓰다가 지우고, 지우다가 또 쓰고를 반복했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는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틀린 생각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계속 엄습했다. 하지만 계속 썼다. 왜냐하면 그 글들이 나에게는 뻔하지 않았고, 틀렸더라도 내가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1페이지를 채웠고, 그 다음 날은 또 한 페이지를 채웠다. 매일 조금씩, 때로는 며칠을 건너뛰면서도, 계속해서 써나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가 쓴 문장들이 길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나를 끌고 가는 작은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는 것을.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문장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 안의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정리하는 과정이었고, 흩어져 있던 경험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었다. 쓰면서 나는 내가 진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막연하게 느꼈던 감정들이 구체적인 언어로 번역되면서, 나 자신을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깨달음은 이것이었다. 책을 쓴다는 건 글을 '잘' 쓰는 게 아니라는 것. 그것은 그 길을 끝까지 걷겠다는 마음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내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의지였다.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는 것이었다. 내가 여기 있었다는 증명이었고, 내가 이만큼 생각하고 느끼고 성장했다는 기록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나요?"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잘' 쓰는 게 아니라 '계속' 쓰는 것이다. 완벽한 첫 문장을 기다리다가 영원히 시작하지 못하는 것보다, 어설픈 첫 문장이라도 써놓고 계속 다듬어가는 것이 낫다. 글쓰기는 마라톤과 같다. 처음 몇 킬로미터를 얼마나 빨리 뛰는지가 아니라,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당신은 어떤 자격으로 글을 쓰나요?"


이제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나는 살아본 자격으로 쓴다고. 실패해본 자격으로, 경험해본 자격으로, 아파해본 자격으로 쓴다고.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글을 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자격이라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마찬가지다. 당신 안에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야기들이 있다. 당신만이 겪은 일들, 당신만이 느낀 감정들, 당신만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들이 있다. 그것들이 바로 당신이 글을 쓸 수 있는 자격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아도 좋다. 당신의 이야기는 당신만이 쓸 수 있으니까.


백지의 공포는 사실 완벽에 대한 강박에서 온다. 첫 문장부터 완벽해야 한다는, 모든 단락이 의미 있어야 한다는, 독자들이 감탄할 만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 말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글쓰기는 불완전한 채로 시작해서, 써가면서 점점 모양을 갖춰가는 과정이다. 조각가가 거친 돌덩어리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깎아내며 조각상을 만들어가듯이.


다시 또 오늘, 한 줄부터 시작해보려 한다. 거창한 주제일 필요도 없고, 깊은 철학일 필요도 없다. 오늘 먹은 점심이 맛있었다는 이야기라도 그저 좋았다. 중요한 건 시작하는 것일테니. 그 한 줄이 두 줄이 되고, 두 줄이 한 문단이 되고, 한 문단이 한 페이지가 되는 마법을 이미 경험해봤기에. 언젠가 뒤돌아보면, 당신도 나처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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