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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한진 Jan 11. 2024

한진 씨의 이상한 런던 기행

올해 봄, 런던에서 약 3주를 보냈다.

올해 봄, 런던에서 약 3주를 보냈다.



커튼을 열면 낯선 곳에서의 하루가 시작된다.



'한 달 살기'

연고가 없는 곳으로 훌쩍 떠나 한 달이라는 시간을 보내는 것.

과거에는 주위 사람들의 눈을 제법 휘둥그래하게 할 법한 일이었다.

그들의 주변인들 사이에서 쉽게 보기 힘든 독특한 일임에는 틀림없었고, 그 단어는 어딘가 한 움큼의 낭만까지도 품고 있었다.


친구들과의 어느 술자리.

빈 술병이 한 병, 두 병 늘어나고 친구 하나가 말한다.


'나 제주도에 가서 한 달 살아보려고.'

'뭐? 제주도에서 한 달이나 산다고?'


아침 새소리에 일어나 조용히 명상과 요가로 하루를 시작한다.

가끔 낮에는 숙소 주인의 감귤 밭에서 일을 조금 돕고 새참을 나눠 먹는다.

내가 수확한 귤의 일부를 한 광주리 받아 방으로 돌아간다.

저녁에는 사람이 적은 자연 속 평상에 홀로 앉아서 풀벌레 소리를 배경음악으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본다.

주변에는 풀벌레 소리가 가득하다.

앞에서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에 넘어가듯 뒤로 누워 하늘을 본다.

머리맡에는 귤껍데기가 이리저리 흐트러져있다.

반딧불이 무리의 아련한 빛을 나이트램프 삼아 스르르 눈을 감는다.

그대로 잠에 빠져 든다.


처음 한 달 살기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 순식간에 쓰여나간 하루의 모습이었다.

이 가상의 시나리오는 감수성을 제법 가득 머금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현실성이 조금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과연 모든 숙소 주인이 감귤 따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이며, 반딧불이가 살 만한 청정한 자연과 거기에 이용 가능한 평상이 있는 공간을 찾기 쉬울 것인가.

또, 감귤 수확철인 가을이 지나가는 계절에 야외에서 그대로 누워 스르르 잠이 든다면, 겨울이 오기 전 생에 남은 힘을 쥐어짜 날뛰는 모기떼들의 최후의 만찬이 되거나 뚝 떨어진 기온에 고뿔 깨나 걸릴 것이다.

거기다 이 시나리오는 시작 부분부터 불확실한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아침에 나를 깨우는 것이 6시 무렵의 새소리일지, 10시 즈음 그만 꿈속에서 빠져나와 아침을 넣어달라고 울려대는 배꼽시계일지도 확실치 않잖아?

상상 속의 나는 게으름이란 것을 모르는 사람 같았지만 어디까지나 상상 속의 나였다.


'한 달 살기'

이 글을 쓰는 2023년 지금은 쉽게 들어볼 수 있는 말이 되었다.

10년 전 '워킹 홀리데이'가 유행했던 것처럼 근 몇 년 간 대한민국 2030 청춘들(과 마음만은 청춘인 이들) 사이에는 '한 달 살기'라는 키워드가 퍼졌다.

마치 점심시간 직전의 조용히 부산스러운 사무실에 퍼지는 흥미로운 연예 가십처럼, 입에서 입으로 순식간에 퍼져 사람들 가슴속 한 귀퉁이에 물들어 앉았다.


방학을 맞거나 휴학 중인 대학생들, 살벌한 취준 시장에 지친 취준생들과 무사히 통과해 낸 취업대기자들, 새로운 출발선에 선 퇴직자들과 이직자들.

각자 다른 이유들로 그들의 바쁜 인생에 적당한 시간이 주어지자, 박 터지는 생존전쟁통에 그들 마음속 깊이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여행이 자연스레 수면 위로 떠올랐다.

힐링, 휴식.

지친 그들은 뭔가를 필요로 했다.

그러다 우연히 한 달 살기를 접하고 이내 마음을 빼앗긴다.

신기루 같으면서도 나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다들 속에 품어두었던 장소로 훌쩍 떠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유행이 되었고, 유행은 곧 트렌드가 되었다.



나도 휴직이란 이벤트로 인생에 처음으로 긴 시간이 주어졌다.

어째 저째 쉴 틈 없이 살아온 덕분에 이 정도의 공백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실히 정할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멀리 나가라 했다.

'한 달 살기'

처음에는 모두가 담합이라도 한 듯 하나의 대답만을 말하니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되어 그것에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것저것 따져 보고 나니 '나도 한 번 해볼까?'싶어지는 것은 밥을 먹으면 배가 불러오고, 물은 안 마시면 목이 말라지는 것 같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평범한 우리네 인생에 외국을 나가는 것은 옆 동네에 놀러 가는 것과 절대 같을 수 없다.

거기다가 한 달의 기간을 내기는 더욱.

모든 결론은 지금이 유일한 기회라는 것으로 내려졌다.

나는 결국 한 달 살기를 받아들였다.

이래서 유행하게 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한 달 살기는 그닥 특별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의 그것에 낭만이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다.

수만 명의 사람이 있다면 수만 가지의 낭만이 있는 것이니까.

당신도 그곳에서 당신만의 낭만을 마주할 것이다.

그 낭만은 우연히 만난 거리의 음식일 수도, 사람일 수도, 길에서 혼자 마시는 맥주 한 캔일 수도, 새 한 마리가 찍힌 풍경 사진일 수도 있다.


유행이 된다는 것에는 장점이 있다.

준비를 하는 데 있어 활용할 수 있는 인프라와 정보가 탄탄해진다는 점.

맨땅에 헤딩이 아닌 선인들의 오답노트를 참고해서 누구든지 만족스러운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이것을 그저 누리면 된다.

나도 그랬고, 여러분도 그럴 것이다.

당신이 지금 시간이 생겼다면, 혹여 언젠가 시간이 생긴다면.

떠나라.


내 여행기가 어떤 누군가의 한 달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내 여행기가 당신의 소소한 티타임에 맛있는 간식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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