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게 앞에 섰다.
[하바나 라바나]
여전히 입에 착 달라붙는다고 생각하는 가게의 이름을, 그리고 그것이 적힌 목제 간판을 바라보았다. 분홍색 바탕에 진한 노란색 페인트로 쓰인 글자는 간판 위에 달린 조명이 내리쏘는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간만에 간판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내가 처음 왔을 때보다 이곳저곳 칠이 벗겨진 부분들이 늘어나 있었다. 차메로에게 조만간 쉬는 날에 가게 간판을 다시 칠하는 건 어떤지 건의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꽁꽁 숨겨둔 내 미적 감각을 뽐낼 기회가 온 것인가! 이참에 아예 색 조합을 확 바꿔보자고 하면 화내려나? 개인적으로 핑크에 노랑은 조금 유치해 보인단 말이지.
머릿속으로 배경과 글자의 색 배합을 이리저리 대보고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가게의 이름을 자꾸 되뇌고 있었다. 입에서 맴도는 그 이름을 곱씹어 보았다.
하바나 라바나, 하바나 라바나, 하바나 라바나라…
언젠가 라바나가 무슨 뜻인지 가게의 사장, 차메로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나도 뜻은 몰라'였다. 의미보다는 어감에 의의를 둔 명명이었나 보다. 확실히 발음하기는 쉬운 이름이었다. 운율감도 잘 살고 말이다.
"빨리 안 들어오고 뭐 해!"
가게 간판에 대한 모처럼의 감상을 깨버리는 차메로의 고함이 안에서 쩌렁쩌렁 들려왔다. 나는 대답 대신 가게 문과 정 반대편 가게 깊숙이 위치한 안쪽의 바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그에게 거수경례를 척 올려붙이고는 가게 안으로 향했다. 차메로는 그런 나를 본체만체했고 정작 내 경례를 받아 준 것은 옆 가게의 야외 테이블에 엄마아빠를 따라 나온 7살 정도로 보이는 꼬맹이였다. 녀석의 비장한 입가에는 와플에서 묻은 듯한 초콜릿 소스가 잔뜩이었다. 형이 입던 것을 물려 입은 듯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꼬질꼬질한 반소매 티셔츠의 꼬마의 경례에 나도 비장한 표정으로 화답했다.
가게가 문을 닫을 때를 제외하고는 늘 열려 있는 바깥벽의 철제 슬라이딩 도어를 지나, 안쪽 벽의 스윙도어를 밀고 들어가며 말했다. 한껏 삐걱거리는 스윙도어도 간판과 같은 재질의 목제로 분홍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따 제대로 장사하려면 목소리 아껴야지 왜 벌써 에너지를 남발하고 그래요?"
때가 저녁시간에 접어들며 가게를 하나 둘 채우기 시작한 손님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걸레가 포물선을 그리며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 나에게 날아들었다. 나는 얼굴 바로 앞에서 잡아챈 걸레를 들고 설렁설렁 방금 손님이 떠난 테이블로 걸어가 정리를 시작했다.
영업시간 중의 식음업장 치고는 다소 화끈한 장면이었음에도 가게 안의 손님들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이런 모습에 놀랄 하바나 풋내기 여행객 손님들은 주로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기 때문에, 지금 가게 내부의 홀에는 하바나 라바나의 거친 일상이 익숙한 마을 주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여행객들은 유독 테라스 자리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내부 홀 석은 지금처럼 대부분 단골의 차지였다. 단골손님인 그들에게는 나를 향해 영어로 고함을 치는 차메로와 그런 그를 아무렇지 않아 하는 나의 모습이 어느새 대단치 않은 일상의 풍경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들이 과연 식사 중인 자신들의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걸레에 익숙해질까 싶었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껄껄껄 웃을 뿐 위생을 문제 삼거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내 고향에서라면 바로 이슈가 되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다 망해도 진작에 망해버릴 식당이었을 텐데. 여기가 서울이 아닌 것이 차메로에겐 천만다행이었다. 본인은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한번 나를 향해 시원하게 고함쳤다.
"나 이제 주방 도와주러 들어가야 하니까 빨리 끝내고 바(bar)로 들어와!"
이번에는 대답 대신 그에게 긍정의 의미로 싱긋 미소를 지어주었다. 왜인지 그 모습에 속이 다시 터져버린 차메로가 그의 우락부락한 덩치만큼 커다란 제스처로 사자후를 내질렀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속을 뒤집은 것 같았다.
어이구, 알겠다는 뜻의 미소였는데 왜 화를 낸담?
"갈 데 없는 외지인 녀석을 데려다가 재워주고, 먹여주고, 일거리도 주고…!”
"...을 데려다가 재워주고, 먹여주고, 일거리도 주고…"
이제는 귀에 익어버린 그의 레퍼토리를 완벽히 간파한 내가 그와 동시에 맞소리 치자 그는 말을 삼키고는 울분을 담아 또 무언가를 던졌다. 나는 걸레에 이어 또다시 손님들의 머리 위를 비행해 날아온 천 조각을 낚아챘다. 이번에는 식탁보였다.
한 시절을 풍미했다는 전직 투수여서 그런지 정말로 끝내주는 던지기였다. 언젠가 나에게 야구의 장점에 대해 열렬히 설명하던 그의 젊은 모습이 잠깐 떠올랐다 사라졌다. 보통 이런 천을 묶지 않고 던지면 공기저항 때문에 비거리가 얼마 안 나와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무사히 도달하다니. 참 대단한 어깨였다.
나는 가게 구석으로 가 예비 테이블 하나를 야외로 꺼내어 두 번째 투척물이었던 식탁보로 새 테이블을 세팅했다. 하얀 천 테두리에 하늘색 무늬가 수 놓인 식탁보를 탁 털어 혹시나 남아있을 먼지를 떨어내고 테이블에 얹었다. 작은 원형 테이블에 딱 맞는 치수였다. 마침 광장을 방황하며 가게를 물색하고 있던 동양인 여자 둘이 그 자리를 발견하고는 냉큼 자리를 잡았다.
나는 나와 같은 동양인이라는 동질감에 반가운 마음이 들어 밝게 인사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스페인어였다.
"올라!"
그들은 일본에서 온 손님들이었는데 둘은 쌍둥이 자매라도 되는 양 생김새가 매우 흡사했다. 동글동글한 인상과 동북아인 여행자 특유의 한껏 꾸미고 나온 차림새에 내 관심이 동했다. 여기 현지 사람들은 절대로 이들처럼 하늘하늘하고 퍼프가 들어간 원피스나 무늬가 이쁘게 들어간 챙모자를 쓰지 않는다.
먼 길을 온 이 귀여운 손님들에게 하바나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여자 손님들과 노닥거리는 모습을 들켰다가는 차메로가 다음으로 나에게 던질 물건이 천 쪼가리가 아닌 무언가 단단하고 위험한 것이 될 확률이 높았기에 메뉴판을 꺼내주고는 그만 가게 안으로 복귀했다(자칭 과거의 핫볼러였던 차메로는 사과 한 알을 던져 얼뜨기 소매치기 하나를 잡은 적이 있었다. 그때의 정확히 제구 된 빠른 구속의 포심은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것이었다.)
차메로는 그사이 주방일을 도우러 들어갔는지 내게 물건을 던져대던 바에서는 그의 모습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아직 바 자리에 앉은 손님은 없었다. 나는 바의 빈 스툴들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꼬질꼬질한 바 안으로 돌아들어갔다. 바에는 오후의 음료 주문 때문에 이리저리 나와 있는 여러 술병이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채 바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천장에 매달려 돌아가는 커다란 실링 팬의 그림자 역시 빙빙 회전하고 있어 어지러운 바 위를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당장에 이것들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바 자리로 돌아오기 무섭게 한 테이블에서 추가 주문이 들어왔다. 나는 다시 바 밖으로 나와 주문을 받았다. 스페인어로 주문하면 어쩌지 속으로 잔뜩 긴장하며 나갔지만 그들은 하바나로 여행을 온 듯한 외지인 백인 노부부였고 다행히 그들은 내가 무리 없이 처리가능한 영어로 주문했다.
"네, 코로나 맥주 2병 알겠습니다."
여기에 눌러앉은 지 1년이 되었지만 내 스페인어는 도통 늘지 않았다(물론 내가 노력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한 차례 고비를 넘긴 나는 문득 페르난도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2주 전에 자기 사촌 형제를 보러 푸에르토리코로 잠깐 떠난 페르난도는 원래 이곳 라바나의 급사이자 내 주변에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의 부재 덕분에 주문과 서빙은 바 담당인 나와 가게의 사장인 차메로가 함께 처리하게 되었다.
스페인어가 유창해지진 않았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현지에 살다 보니 자연스레 귀에 익은 어휘들 덕분에 일하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메뉴 이름과 주문 개수만 스페인어로 이해하고 말할 수 있으면 되니까.
주문은 이런 식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라자냐 1개, 그리고 탄산수 1개 주세요.'
'라자냐 1개, 탄산수 1개, 맞아?'
'오케이.'
'오케이!'
이 같은 주문과정이면 손님과 나, 모두가 만사형통이었다.
노부부의 주문을 받고 바로 돌아온 나는 음료 냉장고에서 코로나 두 병과 바 아래에 위치한 식자재 냉장고에서 라임 소쿠리를 찾았다. 소쿠리 위에 얹어져 있던 이미 반절 잘린 라임을 집어 도마에 올렸다. 미리 잘린 표면이 너무 마르지는 않았는지 점검한 나는 곧 합격 판정을 내리고 두 조각을 보기 좋게 썰어냈다. 내 익숙한 칼질에 라임은 순순히 자신을 나누어 줄 수밖에 없었다.
딱! 딱!
간결한 도마소리 두 번. 그리고 병뚜껑을 딴 코로나 입구에 라임 조각을 하나씩 보기 좋게 끼웠다. 마지막으로 차가운 맥주병에 이슬이 맺히기 전에 휴지 냅킨으로 병 입구를 한 번 닦고 병목에 이쁘게 스카프처럼 둘러준 후 해당 테이블에 내주었다. 그들은 감사 인사와 함께 그들의 나라말로 소감을 나누는 듯했다.
어느 나라 말이지?
새하얗게 샌 흰머리와 그들의 인상에서 북유럽의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덴마크? 스웨덴?
언젠가 듣기로 그 두 나라의 말이 얼추 비슷하다고 했었던 것 같다. 스페인어와 이탈리어가 그렇듯 말이다.
밖의 일본인 손님의 주문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바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본 자매는 꽤나 유창히 영어를 구사했고 잠깐이지만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쟤들이랑 놀아볼까?
한 친구의 왼쪽 눈 아래에 박힌 매력적인 점이 내 시선을 자꾸 끌었다.
마지막으로 여자 손을 잡은 지 벌써 한 달은 훌쩍 넘은 것 같단 말이지.
아니, 어쩌면 거의 두 달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조금 있다 가게 문 닫으면 아름다우면서도 신비로운 하바나의 밤 산책을 안전하게 가이드해 주겠다고 꼬셔볼까? 그런데 둘 중 누구랑? 고민된다면 그냥 둘 다랑?
머릿속에서 조금씩 구색을 갖춰가던 내 작당모의는 갑자기 켜진 가게 내부의 음악 소리에 연기처럼 흩어졌다.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니 가게 한쪽에 작게 마련된 무대의 대형 스피커들이 음악을 쏟아내고 있었다. 바쁜 일을 끝낸 차메로가 홀로 돌아와 음악을 틀고 씰룩씰룩거리며 단골손님들과 인사를 나눴다.
저 모습이 신호탄이 되어 이제 전형적인 라바나의 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술이 오른 단골들은 이제 알아서 냉장고를 들락거리며 술을 꺼내 갔고, 차메로와 다르게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는 나는 매의 눈으로 그들이 꺼내 가는 술들을 카운트해서 주문서 관리를 했다.
"나 얼음물 한 잔."
주방일이 떨어졌는지 밖으로 나온 차메로의 아내 띠또가 바에 기대어 내게 주문했다. 불 앞에서 일하느라 땀을 좀 흘렸는지 띠또가 부엌일을 할 때 둘러쓰는 두건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그녀의 이름은 원래 ‘페넬로피 어쩌고 저쩌고’하는 엄청 복잡한 것이었지만, 처음에 내가 통 알아듣지 못하고 발음도 못하자 그냥 이모란 뜻의 '띠또'라고 부르기로 정했다. 여배우 ‘페넬로페 크루즈’와 비슷한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었지만 나도 네 글자보다는 두 글자가 더 간결하고 좋았다.)
물론 띠또도 여타 동네 사람들처럼 영어는 하지 못했다. 그래도 다른 마을 사람들과 달리 그녀와 있을 때에는 불편함을 느끼거나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우리 사이에는 대화를 굳이 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편안함이 있어서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 아까 썰고 남은 라임을 다시 꺼내어 이번에는 얼음물에 라임조각을 넣었다. 우리는 각자 한 잔의 얼음물을 음미하며 라바나의 시끌벅적한 일상을 조용히 감상했다. 잔을 부딪히는 건배나 대화는 없었지만 같은 감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제목은 ‘요란한 평화’ 정도가 되겠지.
그런 우리를 발견하고는 차메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글쓴이 : *이 붙은 대화문은 스페인어 대화)
*"자기, 마르셀로 아저씨네 테이블에 소시지 몇 개 좀 구워다 줘."
*"우리 아기 가질 계획인 건 맞지? 이렇게 퍼주면 언제 애기 기저귓값 모아! 당신 포기한 거야?"
여기저기 퍼주는 그의 씀씀이가 영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대답하는 띠또에게 차메로가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며 말했다. 그는 느끼하게 눈썹을 한껏 치켜들었다.
*"아기? 당연히 원하지! 말 나온 김에 조금 있다 저번처럼 이 녀석 방으로 잠깐 올라갈까?"
투닥거리던 모습은 어디 가고 순식간에 한데 얽힌 두 마리 뱀처럼 서로를 감싸며 서로 음흉하게 시시덕대고 있는 부부를 보고 있자니 무슨 대화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내용이 뻔히 자막으로 보이는 듯했다. 가게 2층에 창고로 쓰이던 방 하나를 치워 거기에 얹혀살고 있는 나지만, 아무리 눈칫밥 먹고 산다고 해도 내 침대를 지킬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 노동의 대가로 제공받는 정당한 거처가 아닌가! 특히나 이 둘은 이미 몇 번 근무 시간에 눈이 맞아 내 방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이 현장 검거된 적 있는 악질 상습범들이었다.
나는 바를 주먹으로 쾅 내려치고 눈을 부라리며 말없이 그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나보다 한 수 위인 그들에게 나름 과격했던 내 제스처도 그저 앙큼하고 귀여운 항의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그들에게 나는 전혀 무섭지 않은 존재였다. 신장 176cm의 나와 눈높이가 거의 같은 장신의 띠또가 내게 다가와 윙크를 날리며 그녀가 가능한 간단명료한 영어로 말했다.
"그럼, 너도, 같이?"
뭐가 같이야!
복장 터질듯한 내 시야에 그녀의 등 뒤에서 나를 향해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는 차메로가 들어와 내 속을 한 번 더 터트렸다.
아무래도 내 방문을 확실히 잠그고 다녀야겠어. 가뜩이나 오늘은 조금 있다 일본 숙녀분을 초대할지도 모르는 소중한 곳인데…
내게 윙크를 날리는 그들을 흘겨보고는 나는 개인적 볼일을 보러 쌍둥이 자매에게로 갔다.
단골손님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게를 떠난 깊은 밤이 되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 테이블, 저 테이블 흩어져 있던 마을 사람들이 홀 가운데에 하나로 합쳐서 크게 모여 앉았다. 차메로와 띠또도 한 자리씩 차지하고 그들과 본격적으로 어울렸다.
이때쯤이면 슬슬 나도 자유의 몸이 되는 시간이었다. 아까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교환한 '우에다 미호', '우에다 유메' 자매들에게 지금 하바나에서 가장 괜찮은 클럽을 구경시켜 주기로 했었다.
그들의 답장이 꽤나 늦는다는 불안 요소가 있었지만 아직 허탕을 확신하기에는 일렀다. 하지만 마음 한쪽에는 어쩌면 바람맞을 수도 있다는 마음의 준비도 같이 해두었다. 제발 그렇게 되지를 않기 바라며…
그때 마을 주민 중 한 사람이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들렸다.
*"그나저나 외지인은 이제 쿠바인이 된 거야, 차메로?"
귀에 못이 박이게 들어서 이제 쉽게 분간할 수 있는 스페인어 단어였다. 외지인, ‘아푸에리노’. 그들은 1년이 지난 지금도 나를 외지인이라 불렀다. 나는 신경 안 쓰는 척 태연히 바를 정리하며 청각은 그들의 대화에 집중시켰다. 아무래도 타인들이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다.
*"이 봐, 그냥 외지인이 아니라 '정진’! 몇 번을 말해! 저 친구도 이름이 있단 말이야."
*"아, 이름이 이국적이라 그런지 자꾸 입에 안 붙는 걸 어떡해!"
*"그럼 그냥 '진'이라 불러! 저 친구가 그걸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기 이름인지는 알아들을 수는 있다고!"
뭔가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차메로와 그런 그의 반응에 무안한 듯 투덜대는 것으로 나에 관련된 대화는 짧게 끝이 나는 것 같았다. 내가 스페인어를 할 수 있었다면 외지인이 아닌 그들의 구성원으로서 저 사이에 완벽히 녹아들 수 있었을까. 하지만 딱히 아쉬움은 없었다. 나도 내 지금 주변 인물인 여기 라바나 가족들을 제외하고 가까워지고 싶은 생각이 딱히 들지 않았으니까. 나는 예전부터 그랬다. 모두와 스스럼없이 지내지만 내 영역으로 초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제 슬슬 그녀들과의 약속 장소로 나가봐야 하는 시간이었다.
우에다 자매 중에 누가 나오려나?
아무래도 나온다면 둘 다 나오거나, 하나만 나온다면 미호 쪽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까 대화하면서 적극적인 미호의 태도와 보수적인 유메의 태도를 이미 느꼈기 때문이었다. 미호가 눈웃음 지을 때마다 눈 밑의 점도 함께 웃는 것 같았다.
차메로 패거리의 거대한 술자리를 지나 계단을 올라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넓지도 좁지도 않은 내 보금자리가 보였다. 창고로 쓰이던 곳이라 벽지 작업이 따로 되어 있지 않은 벽은 건물과 같은 목재로 되어 있었다. 목재가 주는 느낌을 싫어하지 않았기에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좁은 공간이 넓어 보이는 것은 가구가 많지 않아서일지도 몰랐다.
외출준비는 간단했다. 세안을 하고 머리는 가볍게 쓸어 넘겼다. 방에 작게 나 있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하얀 달빛에 거울 속으로 보이는 내 얼굴이 뽀얬다. 쿠바에 온 이후로 얼굴에만 선크림을 열심히 발랐던 터라 팔다리는 시커메졌지만 원래 하얀 얼굴만큼은 지킬 수 있었다.
거울 속 자신에게 미소를 한 번 지어주고는 옷장으로 갔다. 그러나 금방 옷장 문을 다시 닫았다. 옷들이 특색 없이 다 비슷했거니와 굳이 세탁물을 늘리기 싫어서 오늘 일하며 입은 옷을 다시 집어 들었다. 체취가 적은 편이라 괜찮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혹시 모르니 방문을 나서기 전에 향수도 가볍게 뿌렸다.
방을 나서며 열쇠로 방을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 징그러운 커플이 집 가는 시간을 못 참고 내방으로 직행할지도 모르니까!
계단을 내려오니 그사이 대화의 주제가 바뀌었는지 그들은 사뭇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분위기였다. 내용을 알아듣지 못해도 그들의 표정이나 어투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때문에 경쾌하게 내려가던 내 발걸음이 주춤했지만 그들은 나의 출현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답지 않게 무거운 분위기인 탓에 평소처럼 인사를 하고 나가려던 생각을 바꾸어 조용히 그들을 지나쳐 나가기로 했다. 띠또가 그래도 나를 발견했는지 인사치레로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내 엉덩이를 말없이 툭 쳤다.
가게 입구를 나서는데 그들 대화에서 또 '아푸에리노'가 들렸다. 또 내 얘긴가 싶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들은 소문인데…"
*"뭔 소문인데 이렇게 뜸을 들여?"
*"그게 말이지, 오늘 하바나에 위험한 외지인이 들어온다더군."
*"위험한 외지인? 그게 누군데?"
*"저기 멕시코로부터 온다는 모양이니까…"
*"설마 모르싸 카타리나…?"
반란을 준비하는 비밀모임이라도 되는 듯 그들은 아예 둥글게 얼굴을 모아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푸에리노’라는 단어가 나왔음에도 나를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걸로 보면 내 이야기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거기까지 판단한 나는 미련 없이 가게를 나섰다.
'아푸에리노'
어감은 참 마음에 드는데 말이지. 그래, 외지인은 외지인끼리 놀아야지. 아시아인은 아시아인끼리.
아직 문을 닫지 않은 다른 가게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일본어 저녁 인사말이 '곰방와' 였었지?
내 기분은 정확히 30분 후에 엉망이 되었다. 믿었던 미호에게서도 안 좋은 소식을 들은 것이다. 마지막 메시지로부터 1시간 넘게 답이 없던 그들은 결국 약속 시간을 넘겨서야 답을 보내왔다.
'미안해요… 내일 스케줄이 많이 바빠서.'
젠장, 어쩐지 답이 늦어질 때부터 느낌이 싸하더라니! 그리고 알려줄 거면 약속 시간 전에 미리미리 알려주는 것이 어른스러운 행동이자 국제적인 매너가 아닌가. 거절한다고 내가 찾아가서 총기 난사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오늘 밤 하바나가 퍽 근사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어찌하여 이 아름다운 밤을 놓치려는 것일까. 한숨과 함께 바라본 하늘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달과 별은 밝았고, 높게 뜬 구름은 적절히 흩어져 있어 운치를 더했다.
그러면 뭐 하나 결국 혼자인걸!
불안한 마음이 들 때부터 눈치를 채고 진작에 체념했었지만 결과를 확인하자 고개를 드는 약간의 배신감에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아름다운 밤에 아름다운 나와 함께 한다면 아름다운 시간이 될 것임이 너무나도 분명한데! 고향나라에서는 늘 치고받는 동북아 3국, 한·중·일도 외국에서는 똘똘 뭉친다고 하는데 순 거짓부렁이었다. 구시렁구시렁 툴툴거리다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 궁상을 떠는 것도 이만 멈추기로 했다.
온몸으로 낮과는 다른 서늘한 밤공기를 가만히 느꼈다. 느긋하게 작은 교회가 위치한 다른 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있는 거대한 피자 가게가 문을 아직 열었다면 근사한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스쿱을 맛볼 수 있으리라.
요즘 이 거리에서 종종 목격되는 민트색 폭스바겐 비틀 차량이 보였다. 상당한 연식의 클래식카였다. 사이드 미러에 달이 비치게 구도를 잡고 하바나 정취 가득한 이 차량의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나는 SNS에 이런 이국적이고 느낌 있는 사진들을 종종 찍어 올리는 것이 번역의뢰가 들어오는 것에 도움이 되리라 믿고 있었다. 영문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것은 인터넷만 있으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부업으로 내게 매우 적합했다.
민트색 비틀 말고도 도롯가에는 잠들어 있는 연식을 알 수 없는 차들이 많았다. 그들을 지나쳐 목표한 광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피자 가게는 문을 이미 닫은 상태였다. 아이스크림을 못 먹는다는 아쉬움이 일었지만 이는 곧 내 특유의 긍정 회로를 거쳐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변환되었다.
변변치 않은 지갑 사정에 잘된 일이지. 그까짓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먹을 돈으로 술 한잔을 마실 테다.
이런 긍정의 마음가짐은 우리의 삶을 조금 더 윤택하게 만들어준다. 마침 등 뒤에서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이 잘 생각했다고 나를 토닥여주는 것 같았다. 미국에서 살 때 내 등을 두드리던 엄마의 애정 어린 손길이 떠올랐다. 그 이후로는 그녀에게서 그런 손길을 받은 적이 없었다.
차분히 기분전환을 끝낸 나는 원래 우에다 자매와 가려 한 클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파라이소]
하바나에서 가장 트렌디하고 힙한 클럽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곳이었다. 남미 출신의 유명 여배우 '아나 디 아르마스'가 인증샷을 올려 더욱 이슈가 되었었다. 낡아빠진 차메로의 가게와 달리 근사한 네온사인 간판이 매력적인 입구에는 벌써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득실대고 있었다. 드레스 차림의 여성과 탱크톱에 핫팬츠의 여성들, 반소매의 리넨 셔츠의 남자와 민소매 티를 입은 남성들이 혼재했다. 드레스 코드 따위는 없는 자유로운 복장들의 향연이었다. 아무나 올 수 있지만, 아무나 올 수 없는 곳.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1층의 열린 창문과 문에서 힙합 비트가 섞인 스윙재즈가 들려왔다. 얼핏 듣기로는 라이브 연주인 것 같았지만 대형 스피커에 재생되는 음악이었다. 그 흥겨운 박자를 따라 절로 몸이 까딱거렸다.
그래, 혼자면 어떠냐. 나 정진, 타고난 한량이었다. 흥겨운 발걸음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