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한진 Sep 09. 2024

챕터 2. 한량

2. 한량



    사람들은 나를 한량이라 평가했다. 나 스스로도 자신을 평가하라면 사람들의 한량이라는 평가에 손을 들어줄 것이다. 유유자적 속세의 흐름에서 벗어난 것 같이 세상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어릴 적부터 이미 그 싹이 보였다. 아빠는 내 한량의 자질을 처음 목격한 것이 유치원 학부모 참관 수업에서였다고 했다.

    내가 다닌 유치원은 동네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인 수업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벤트를 계속해서 준비하던 유치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4층짜리 거대한 건물의 옥상에는 전문적인 태권도장과 맞먹는 시설의 운동시설과 요즘의 키즈 파크처럼 거대한 볼풀도 마련되어 있었다. 어린아이들의 눈이 돌아갈 만한 것들이 잔뜩 있는 곳이었다는 말이다. 거기다 시설에서 원아들에게 제공하는 것에 비해 등원 비용도 비싸지 않아서 그 동네 부모들이 모두 등록하고 싶어 하는 지역의 인기 유치원이었다.

    당시 나는 6살짜리 영아들이 모인 민들레 반에 속해 있었다. 꿈 많은 우리들은 각자 되고 싶은 장래 희망의 직업을 조사하고, 그 직업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연구하여 직접 역할극을 해보는 시간을 가졌었다. 본 프로젝트는 학부모 참관으로 진행되어 아이들의 귀여운 재롱잔치 시간이자 부모들과의 추억 만들기 역할도 했었다.

    같은 해 초등학교에 진학한 형의 학교에서도 같은 날 학부모 참관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형과 엄마는 그쪽에 가 있었다. 따라서 우리 가족 중에 그날 유치원 강당에 출석한 것은 나와 아빠뿐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여차하면 우리가 편부모 가정으로 보일 소지가 다분했던 것 같다. 대부분의 가족들은 두 부모님들이 참석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빠와 나는 이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친구들 모두 한껏 들떠 있었다. 모두 의사, 변호사, 과학자 등의 대표적이고 멋진 직업을 골라 준비했다. 평소에 나를 귀찮게 따라다니던 대형 양복집 외동딸 영지는 당시에는 의사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지, 도화지에 크레파스로 색을 칠하고 가위로 오려 만든 청진기를 목에 두르고 흰 의사 가운을 걸쳐 자신의 의사 복장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다짜고짜 사람들의 배꼽에 청진기를 갖다 대며 ‘묻지 마 진찰’을 하고 다녔다("영지야 배꼽이 아니라 조금 더 위에 가슴에 대야 해-읍!" 심술쟁이 영지는 자신에게 훈수를 두는 엄마의 입에 청진기를 대어 그녀가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직업을 골랐었냐고? 지나가는 어른들 모두가 한 마디씩 감탄사를 뱉은 내 직업은 바로 침대회사 연구원이었다. 침대회사 연구원에 완벽 몰입했다는 핑계로, 나는 모두가 바쁘게 강당을 돌아다닐 때 구석 한 귀퉁이에다 커다란 부직포를 깔고 누워 있었다.

    그 시절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시몬스 침대의 광고를 인상 깊게 보았던지, 준비물로 지급된 도화지를 삼각기둥 형태로 접어 명패를 만든 뒤 거기에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라는 문구도 써넣었다. 거기다 어디서 또 본 건 있었던지 캐노피형 침대를 표방한 나는 부직포 침대의 네 귀퉁이에 기다란 키친타월 두루마리를 기둥처럼 높게 세워 나만의 침대를 완성시켰다. 먼지가 풀풀 나는 강당 바닥이었지만 제법 아늑하니 누울만했다.

    나와 함께 흔들림 없는 편안한 침대에 누워있던 아빠는 담임 선생님이 접근한 다음에야 민망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선생님의 존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은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스스로 팔베개를 벤 채 다리를 꼬고 발끝을 까딱까딱하고 있었다. 강당의 다른 가족들은 각자의 직업 놀이에 빠져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우리 가족만 너무 정적이었다는 점이 오히려 눈에 띄었는지도 모르겠다. 제식을 맞춰 움직이는 의장대에서 한 사람이 조금만 틀려도 눈에 띄는 것과 같은 원리인 것이다. 아빠는 당시 속한 군부대 이발소에서 전형적인 군인 머리로 정리한 짧은 옆머리를 벅벅 긁었다. 무안함에 그는 허허 웃으며 아무 말이나 뱉었다.


    "참… 흔들림이 없죠?"


    거기에 나의 한마디도 아래에서 아빠의 말을 거들었다.


    “그래서 매우 편안하죠!”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긴 생머리의 담임 선생님은 머리를 넘기며 ‘호호’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회색 카디건이 그녀의 팔을 따라 펄럭이는 것이 내 기억에 아직도 남아있다.


    "정말 그래 보이네요."

    "저희 아들이 침대 회사에서 촉망받는 수석 연구원이라 이번에 기가 막힌 제품을 개발했나 봅니다. 한 번 누워 보실래요?"


    이번에도 나는 아빠의 말에 장구를 맞췄다.


    "그래요, 선생님! 한 번 누워 보세요! 제가 팔베개도 해드릴게요."


    딱딱한 바닥이나 다름없는 곳에 누워야 한다니 별로 내켜하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선생님은 내 성화에 못 이겨 신발을 벗고 흔들림 없는 침대에 올라와 내 자그마한 팔을 베고 누웠다.


    "어때요?"


    내가 소감을 물었다. 선생님은 생각보다 느낌이 좋았는지 '호오' 같은 소리를 내다가 대답했다.


    "이렇게 강당 천장이 높은지 몰랐어."

    "남들처럼 바쁘게 살다 보면 이렇게 위를 쳐다보는 시간이 줄어들어요. 그러면 천장이 높은 지도 잊게 되는 거예요. 제 덕분에 좋은 구경 하죠?"


    나도 어렸지만 나름의 철학이 있었단 말이지. 선생님은 내 당돌한 연설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진아, 넌 진짜 타고난 한량이야."


    그러다 서서 우리 둘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빠의 눈치를 살피고 말을 덧붙였다.


    "아, 한량이라는 말은 말이죠. 물론 나쁜 뜻은 아니었어요, 아버님."


    아빠도 다 이해한다는 듯 대답했다.


    "뭐 괜찮습니다. 저희도 가끔 하는 말이니까요."

    “확실히 정진이는 보통의 또래들과는 조금 다른 감각이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은 난감한 주제를 내 칭찬으로 급하게 돌리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이후 잠깐의 휴식 후 그녀는 내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자신의 본분을 다하러 인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그렇게 정해진 활동 시간 내내 시간을 보냈다. 중간에 소아과 의사에 100% 빙의 완료된 영지가 난입해 환자 역할을 반강제로 해야만 했지만, 뭐 크게 힘든 일은 아니었다. 나의 역작 시몬스 침대는 잠깐 병상 침대로 변신해야 했지만 병상 침대도 흔들리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기억을 더 더듬어보면 영지는 결국 주사를 놔야 한다며 내 뽀얀 엉덩이까지를 취하고 나서야 자리를 떠났다.)


    몇 년 더 지나고 초등학교 때의 내 꿈은 우주비행사가 되는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무중력 상태에서 둥둥 떠다니는 모습이 내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와 서였다.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우주인들이 튜브형 우주식량을 쭉 짜서 받아먹는 모습은 그야말로 게으른 모습의 표본처럼 보였는데("맙소사, 누워서 밥을 먹을 수 있다니!"), 우주인들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열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였다.


    물론 게으른 내가 움직이기 싫어하는 포켓몬스터의 잠만보 같은 사람이나 뒤룩뒤룩 살이 쪄 험프티 덤프티 같은 체형의 인간이 된 것은 아니었다. 한량과 게으름뱅이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다행히 어릴 적 내 한량의 형질은 자라나면서 움직이기를 싫어하는 게으름뱅이 쪽으로 변화하지 않고, 삶을 여유롭게 바라보며 사는 것으로 변화했다.

    초등학교 2학년, 9살이 되던 해에 우리는 미국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해군으로 근무하던 아빠가 미국 애리조나 피닉스로 장기 발령이 난 것이었다. 아빠는 근무지로 피닉스와 근처의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를 번갈아 가며 근무했지만 우리의 주 근거지는 피닉스였다.

    나는 피닉스의 이름이 멋있다고 생각해 만족하고 있었지만, 엄마는 한인 사회가 크게 형성이 된 캘리포니아의 LA로 갔으면 하는 아쉬움을 늘 입에 달고 살았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아빠를 기러기로 만들 생각은 없던 엄마는 결국 피닉스에 정착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예정에도 없던 미국 생활 길에 올랐다.

    형과 나는 당연히 현지의 학교에 다녀야 했다. 우리 형제는 당시의 미국 내 동양인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보다는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졌던 탓인지 동양인 스테레오타입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사실 전학 초기에 내게 눈을 찢는 제스처를 보낸 아이가 있었지만, 우리를 위협하는 적이라면 무서울 것 없이 덤벼드는 우리 형제의 완벽한 합공에 제압되었다.

    그날의 격투는 형과 가끔 통화할 때마다 매번 추억하는 레퍼토리였다. 


    "락커에서 다음 시간 교재를 꺼내는데 누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잖아. 뒤돌아보니 웬 삐쩍 마른 꺽다리가 눈 마주치자마자 눈을 찢는 거 있지. 우리 엄마가 학교 보낼 때마다 말했었잖아. 그런 식으로 조롱하는 애들 있으면 기에 눌리지 말라고."

    "하하, 그러셨지. 아무리 생각해도 참 대단한 분이셔."

    "그 순간만큼은 나도 효자가 되어서 엄마 말 잘 들었지. 바로 라이트훅을 딱! 그래도 마침 나타난 형이 아니었으면 나 그 자식한테 밟혔을지도 몰라."

    "그래, 인마. 그날 아침에 런치 박스가 서로 바뀐 것 같다고 너 찾고 있지 않았다면 그랬을걸? 그 녀석 마르기는 했었지만 키 하나는 컸잖아."

    "엎치락뒤치락하는데 아무도 말리지는 않고, 내가 녀석 아래에 깔렸을 때 형이 나타나서…"

    "혼신의 드롭킥 한 방!"


    크흐!

    여기가 항상 우리가 동시에 감탄사를 넣는 부분이었다. 어릴 때에는 어른들이 했던 얘기를 또 하고, 했던 얘기를 또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나이가 들어보니 과거의 추억을 공유한 사람과 그때의 기억을 불러오는 것은 질리지 않는 맛이 있었다.

    한바탕의 거친 소동을 벌인 덕분에 학교생활도 딱히 괴롭힘이나 무관심 속에서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몇몇 아이들은 그게 동양의 신비로운 태권도냐며 가르쳐 달라는 말과 함께 다가오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들 틈에 끼어서 무리 지어 다니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늘 적당히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친구들은 히피스러운 내 모습을 좋아했다. 아시아인의 히피함이라니! 우리로 따지면 용비어천가를 외우고 다니는 아프리카인이나 유교 예절이 몸에 밴 유럽인 같은 참신함이 아니었을까?

    우리 형은 나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내가 한량이라면, 형은 성공을 좇는 치밀한 사냥꾼이었다. 잘생기고 건강한 형은 한국의 학교에서도 반장을 매년 놓치지 않았다. 그랬던 사람이 미국으로 넘어가서도 변할 리 없었다. 이런저런 활동을 하던 끝에 결국 그 학교 최초의 외국인 학생회장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자리에 역임하게 된다. 한인들이 많았던 동부와 서부 끝이 아닌 그 당시의 애리조나주에서는 충분히 놀랄 만한 흔치 않은 일이었다. 엄마의 편애는 어느 순간 시작되었다.


    엄마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군인의 아내이자, 아들 둘의 엄마로 살며 굳센 엄마는 점점 억세어졌다. 그와 함께 그녀의 욕심도 함께 자라났다. 그녀는 자기 아들들이 좀 더 많은 것을 성취하기를 원했다. 그것을 위해서 그녀 스스로 우리 집안의 장군이 되었다.

    아무도 엄마를 거역하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늘 우리를 위한 원대한 계획들이 있었다. 이것을 배워라, 이 책은 꼭 읽어야 한다, 이번 시험에서 이 기준은 꼭 넘겨야 한다…

    엄격한 엄마식 생활에 늘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특전사 훈련처럼 지옥 같은 생활을 한 건 아니었다. 엄마의 강인한 힘은 우리가 이역만리 타지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녀의 훈육 속에 형은 점점 더 높은 곳으로 향했다. 그 스스로가 그것을 원하기도 했기에 형은 엄마의 지휘통제에 손발을 척척 맞춰 움직였다. 물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사람에게 밧줄을 던져준 것처럼 둘은 시너지를 발휘했다. 그렇게 그는 단계 단계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향했다.

    그렇다면 나는 피라미드의 어디에 있었냐고? 어디에도. 나는 피라미드의 바깥에 있는 것을 선택했다. 어느 계층에도 속하지 않고 그들의 범주 밖을 우주 유영하듯이 떠다녔다. 물에 빠진 나에게 엄마는 형에게 준 것과 같이 밧줄을 던졌지만, 나는 밧줄을 잡는 대신에 물에 둥둥 뜨는 법을 익혀 팔베개하고 물 위에 누워 망망대해로 흘러나가 버렸다.

    엄마는 그런 내가 탐탁지 않았고 결국 크게 한 번 충돌을 한 사건 이후로 내게서 모든 관심을 끊어버렸다. 비극인지 다행인지 나도 크게 아쉽지 않았다. 화목한 가정이 될 수 없다는 비극이면서, 동시에 잘 맞지 않는 사람끼리 더 이상 충돌할 일 없으니 평화적인 결말이라 볼 수 있기도 했다.


    미국으로 가게 된 것은 내게 있어서 큰 행운이었다. 지능이 떨어지거나 집중력이 없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학교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적당히 총기 있고 재치가 있다는 학생기록부의 코멘트들이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학업 면으로 내 능력은 발현되지 않았다.

    이처럼 학업에 큰 뜻이 없던 나였지만, 미국에서 강산이 한 번은 변한다는 10년을 생활하다 보니 영어는 수준급으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어학 능력 하나로 나는 그럭저럭 뒤처지지 않고 생의 다음 단계들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아빠의 파견이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끝났다. 형은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의 명문 스탠퍼드 대학으로 진학을 한 상태였다. 그래서 우리는 형을 미국에 남기고 한국으로 복귀했다.

    뛰어난 학업 성취를 거두지 않은 내가 과연 괜찮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까? 당시의 나는 대학에 진학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가면 좋겠지만 안 가도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리라. 이렇게 내 한량 적 인생관이 다시 한번 자신의 주장을 펼쳤지만, 이 주장은 나에 대한 엄마의 혐오만 키울 뿐이었다. 엄마는 차가운 눈빛과 꾸지람을 한바탕 쏟아내고는, 결국 내가 원치도 않은 해결책을 찾아와 나를 대학으로 잡아 끌어넣었다.

    몰랐었지만 미국에서 10년을 거주하며 영어가 자연스러워진 나는 '외국어 우수 장학생'이라는 범주에 속해 있었다. 충분한 수준의 학업 성취가 없이도 '미국 고등학교 졸업장'과 '원어민급 영어 실력'이 두 가지만으로도 나를 반겨주는 대학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렇게 나는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위치한 '한국 외국어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애초에 엄마의 목표는 우리 형제를 좋은 학교로 진학시키는 것에 있었다. 목적을 달성한 그녀는 이제 그녀의 짐을 훌훌 털어버렸다. 새끼 새들이 모두 떠난 그녀의 둥지는 조용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남은 마지막 임무는 한국 복귀 후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하기 위해 노력하는 아빠뿐이었다. 이제 그녀는 자식들에게 쏟았던 에너지를 아빠를 위한 내조 쪽으로 돌렸다. 나에게서 관심을 옮긴 부모님과의 교류가 자연스레 점점 잦아들었다. 충돌할 일이 없어지게 되니 가정에는 다시 평화가 깃들었다.


    고향을 떠나 시작된 대학 생활은 내 한량 기질을 뿜어내기에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우선 부모님과 독립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점과, 모든 것을 학생 자율에 일임한 대학교는 자칫하면 방임의 늪에 빠질 수렁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착실한 학생들보다 그 늪으로 더 깊게, 더 자주 빠질 사람이었다. 놀랍지도 않게 나는 매 걸음 그 수렁을 밟았다.

    학교가 위치한 회기 지역은 근처에 경희대, 고려대, 서울시립대,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의 대형 학교들이 밀집된 대학가였다. 놀거리와 즐길 거리가 많았고, 사람도 많았고 만남도 많았다.

누군가 말했다.

    '군대 다녀오면 다 정신 차리게 되어있어.'

    애초에 난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세상에 100%가 어디 있는가. 그리고 군대를 전역한 나는 내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입증하듯 보란 듯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전역 후 오히려 더 큰 방황을 하던 나는 결국 충동적으로 자퇴한다.

    나의 자퇴는 안타깝게도 그리 좋은 타이밍에 일어나지 않았다. 호봉이 가득 찬 대령인 아버지는 결국 장성으로 진급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에서 미끄러졌다. 거기에 힘들게 보낸 대학을 제멋대로 자퇴한 아들의 소식이 겹쳐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 평생의 목적이었던 가족들의 성공이 이렇게 무너지는 것인가. 그나마 미국에서 국제 변호사의 길을 착실히 걷고 있는 형이 있어서 그녀는 버틸 수 있었다.

    마음을 추스른 그녀는 긍정적으로 상황을 보기로 했다. 군대에는 대령까지도 진급하지 못하고 전역하는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거기에 그녀는 이제 퇴역한 남편과 함께 높은 수준의 대령급 연봉을 받으며 안락한 은퇴 라이프를 즐길 것이다. 물론 허락 없이 자퇴 후 외국으로 내빼버린 둘째 아들인 나와는 연을 끊다시피 했지만.


    그렇게 한국에서 도망친 나는 무작정 외국을 전전했다.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점은 대학 입시 때뿐만 아니라 맨몸으로 뛰어든 외국에서도 나를 먹여 살렸다. 처음엔 앞이 막막했지만 실제로 부딪혀보니 이게 이렇게도 되나 싶은 정도로 길은 늘 열려 있었다.

    풍족한 삶은 아니었지만 연명은 가능한 수준이었다. 졸업 후에 출판 매체 업계에 들어간 학교 동기가 연결다리 역할을 해준 덕분에 가끔 번역의뢰가 들어와 종종 부업 삼아 하곤 했다. 그러다 29살이 되는 작년, 내 발길은 이곳 쿠바로 향했다.



    바깥부터 시끌벅적한 파라이소는 내부도 사람으로 붐볐다. 높은 색온도의 어둑어둑한 조명들이 밤의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고, 스테이지로 사용되는 공간에는 사정없이 번쩍거리는 블루라이트가 춤출 맛을 돋우고 있었다.

    나는 다행히 바의 구석 자리 하나를 간신히 구해 앉을 수 있었다. 일단 술 생각이 간절했다. 빠르게 한 잔 마시기로 했다.

    사실 바 자리라고 하기에는 가장 끝의 툭 튀어나온 자리인 데다가 바로 앞이 기둥으로 막혀 있어 독립된 테이블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 기둥에는 이런저런 스티커들, 클럽에서 열릴 특별 공연의 광고들이 작게 인쇄되어 붙어있었다.

    조금 동떨어진 자리에 앉은 내가 술을 주문하기 위해서는 바텐더를 거의 소리쳐 부르다시피 해야 했다. 나는 목청에 힘을 잔뜩 주고 예거 밤 하나를 시켰다. 주문과 동시에 금방 만들어져 나온 술을 시원하게 한입에 털어 넣으려고 했지만, 오늘은 조금 피곤했던지 한입에 꿀떡 넘어가지 않고 입에 자꾸 걸리는 느낌이었다. 뭔가 껄끄러운 느낌에 가까웠다.

    결국 나는 반 잔만을 마시고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식도를 넘어간 독한 술은 즉각적으로 내 몸을 데웠다. 자리에 앉아 파라이소의 분위기를 느끼며 천천히 올라올 취기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음악 소리, 웃음소리, 잔을 부딪치는 소리. 하바나 밤의 소리가 좋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