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함을 느꼈다. 나는 거위 털이 묵직하게 누벼진 흰 이불을 걷어찼다. 이불은 그 두꺼운 두께만큼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문득 이 녀석을 처음 봤을 때, 내가 얼마나 신나 했었는지가 떠올랐다. 우다다 달려가 그대로 점프해서 얼굴을 처박았었지 아마.
걷어찬 이불 위로 한 다리를 턱 올렸다. 벌써 자정이 훨씬 지났음에도 잠은 전혀 오지 않았다. 오히려 눈앞의 천장은 어두운 밤 속에서 더욱 또렷했다.
짙은 네이비 색 실크에 흰 자개단추가 빛나는 파자마 앞섬을 풀어헤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슬리퍼를 신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맨발로 침대를 벗어나 두꺼운 카펫을 건너 창가로 갔다. 머리 위의 거대한 샹들리에 크리스털 알 하나하나에 그 아래를 지나가는 내 모습이 잘게 나뉘어 비쳤다. 두꺼운 암막 커튼과 뒤에 겹친 옅은 시폰 커튼을 한꺼번에 잡고 단숨에 열었다. 커튼이 숨기고 있던 하얀 달빛이 내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아니, 이걸로 부족해.
나는 새시를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고요한 알프스의 자태에 반사된 달빛이 시렸다. 그제서야 나는 만족할 수 있었다. 답답함이 조금은 풀렸다.
금방 찬 공기가 내 속살을 파고들었다. 난간 아래 공터에 잔뜩 쌓여 있는 눈이 보였다. 만화적인 그림체로 저 눈더미에서 삐뚤빼둘한 선형의 냉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어와 하늘색 선으로 표현된 냉기들을 흩트려 날려버렸다. 슬슬 이곳의 냉랭함에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그러지 못했다.
하긴, 나는 그곳에서도 스페인어가 전혀 늘지 않았었지.
역마살이 낀 한량의 본성이 이제 슬 이곳을 떠나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나는 그 목소리에 답을 하는 대신에 가만히 서서 호흡했다. 내 숨결을 따라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한숨을 쉬었다. 이번엔 유독 짙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공중에 흩어지는 뿌연 입김을 스크린 삼아 그 속으로 이곳에 오기 전에 머물렀던 장소가 영사되는 듯했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 문을 바라보았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지?
내가 잘못 들은 것일지도 몰랐다. 문과 정반대 편에 위치한 테라스에 나와 있으니 거리가 제법 있어 잘못 들을 법도 했다. 이 사치스러운 요양원의 객실들은 하나 같이 모두 거대했다.
허상의 상대에게 '누구세요?'라고 답할 수는 없으니 대신 조용히 문을 바라봤다. 다행히 응답받지 못한 노크 소리는 다시금 들려오거나 하지 않았다. 가만히 문을 바라보다 어느 결에 집중력이 풀어진 내 머릿속은 순식간에 작년의 한 시점으로 돌아갔다.
작열하는 태양은 일몰의 범주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강렬한 빛을 내뿜어 이 도시를 달구고 있었다. 주간 내내 백색광을 뿜어대던 햇빛은 고도가 낮아짐에 따라 그 색은 점점 노란빛을 띠기 시작하여 이곳이 지닌 정열의 색감을 더욱 진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담벼락에 걸터앉아 다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때맞춰 불어온 산들바람이 어느새 어깨까지 자라 내려온 내 장발의 머리도 살랑 흔들었다.
여유. 그다지 치열하지도, 그다지 정신없지도 않은 삶이었기에 이미 내게는 충분량의 여유가 확보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유로운 삶의 순간순간에 추가분의 여유를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바람을 따라 몸을 흐느적거리는데 순간적인 반짝임이 눈을 찔렀다. 태양광의 일부가 말레콘 비치의 바닷물에 반사되어 내 시선을 끌었다. 저 멀리 말레콘 비치가 작게나마 한 조각 보이는 이 담벼락은 나만의 장소였다.
나는 어디를 가든 나만의 장소를 찾아내는 것을 즐겼다. 모험심이자 탐험 심이랄까. 아직도 세상에 모험가라는 직업이 있었다면 내 인생도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포브스 선정 올해의 인물로 뽑혀 포브스, 타임지 등의 잡지 표지를 장식하고, 각종 매체의 인터뷰와 프로그램, 강연 등에 초청받는 모습을 그려봤다. 그러면 부모님도 끝내 내게 미소를 거두는 일은 없었겠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나는 이방원의 '하여가'를 읊조리며 담벼락 위, 시멘트가 주먹만큼 깨져 나간 부분에 언젠가 넣어둔 분필을 꺼냈다. 이런저런 먼지가 낀 백묵을 들고 앉은자리 주변 근처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 넣었다. '오늘의 기분은 양호함'이라는 뜻이었다. 분필을 다시 제자리에 던져 놓고, 다리를 끌어올려 아빠다리를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내 주변에는 X와 O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대부분은 비와 바람에 희미해져 있었지만 그 위로 새로 그려진 문양들이 그들을 덮어 내 새로운 감정의 기억들을 덧칠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 담벼락은 내 감정의 일기장이렸다.
그사이 해가 더 내려갔는지 말레콘 비치의 수면 위로 일몰의 붉은빛이 얼룩지기 시작했다. 내가 자리를 틀고 앉은 여기는 탁 트인 하늘은 물론이고, 이 도시 특유의 알록달록하면서도 사막 같은 무미건조함이 섞인 색감, 거기다 시원하고 푸른 한 조각 바다까지 얹어서 육해공을 한 프레임에 모두 조망할 수 있는 포인트. 이 담벼락을 찾은 것은 내게 찾아온 일상의 소소한 행운 중 하나였다.
언젠가 한 손님이 선물로 준 싸구려 팔찌를 물어간 도둑고양이 녀석을 쫓아 여기까지 기어올라왔을 때 눈에 들어온 이 풍경이란! 거기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곳은 일반적인 담보다 훨씬 두껍게 지어진 덕분에 착좌감과 안정감이 매우 뛰어난 곳이었다. 줄기는 가느다랗지만 거기에 달린 잎은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뒤를 가려주고 있어 밖에서 찾아내기도 힘든 일종의 숨겨진 장소라고 할 수 있겠다.
아마 내가 이곳을 정복한 최초의 인간이지 않을까? 나의 등장 전까지는 고양이들만의 전용 샛길이었으리라. 가끔 여기 앉아있으면 겁 없는 고양이가 내 허벅지를 즈려밟으며 지나가곤 했다. 나를 건넌 뒤 뒤돌아 한 번 울어주고 제 갈 길을 가던 모습은 꼭 '왜 길을 막고 난리야'라고 불평하는 것 같았다.
해가 지는 속도는 밤이 오는 속도만큼 빨라 어느새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근처 광장에 조명들이 밝아지며 시끌시끌한 소리가 커졌다.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 잔들이 부딪히는 소리. 바로 내가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왔음을 뜻했다.
나는 주변보다 약간 더 툭 솟아오른 건물의 담벼락에서 한 마리 고양이처럼 사뿐히 내려와 다시 골목길로 들어섰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게를 향해 걸었다. 해가 졌지만 사람들의 옷차림은 여전히 짧았다.
이미 저녁 영업을 시작한 식당들은 야외에 테이블을 내어놓기 시작했다. 그 옆으로 신나서 질주하는 개 한 마리, 뒤이어 손아귀 힘이 모자라 산책 중에 개를 놓쳐버린 아이가 녀석을 뒤쫓고 있었다. 야외 테이블에 화병을 올리다 스치듯 지나가는 녀석들 때문에 아끼는 화병을 깨뜨릴 뻔한 똥똥한 여주인이 놈들에게 뭐라고 소리를 쳤다. 그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뭐 대충 욕지기겠지?
그들을 지나쳐 코너를 돌아 내 일터가 있는 큰 길거리로 접어들었다. 길 위에는 알록달록한 삼각형 깃발들이 운동회의 만국기처럼 걸려있었다. 음악 소리는 지나가는 누구라도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남미인 특유의 폭발적인 몸매를 가진 아가씨가 그의 남자친구로 보이는 남자의 팔짱을 끼고 씰룩씰룩 길을 걸었다. 걸어가는 커플 옆으로 흰 눈썹, 흰 콧수염이 빼곡히 들어찬 아저씨가 뭐가 그리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친구들과 함께 앉아있는 야외 테라스의 테이블을 부서져라 두드렸다. 그 위 3층의 열린 창문에서 창틀에 널어두었던 손수건을 팡팡 털다 놓쳐버린 아주머니의 외침이 들렸고, 서로 아는 사이였던지 야외 테라스 다른 테이블의 한 청년이 소리를 치며 광장을 향해 날아가는 손수건을 잡기 위해 쫓아 달려갔다.
나는 너풀너풀 잘도 날아가는 손수건을 바라보며 무심결에 들리는 음악을 따라 흥얼거렸다. 아무래도 이곳에 눌러앉은 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지 않을까. 돌바닥에서 아직 식지 않은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태양도, 바다도, 사람도, 바닥도 뜨거운 곳. 내가 있던 그곳은 하바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