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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심 Jan 31. 2021

덧없음을 기록하다

어차피 내려올 산을 왜 힘들게 오르는 것일까? 한때 나도 산을 다닌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무언가에 잠시 깊게 빠지는 시기가 있다. 지리산을 당일코스로 다녀오고 아쉬움이 남았던 얼마 후, 등산을 좋아하는 친구가 지리산을 1박 코스로 가보자고 했다. 산장에서 잠을 자고 새벽 4시에 기상해서 등반을 시작했고, 짙은 어둠 속에서 앞장서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 오르고 또 올랐다. 이미 앞선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정상에 오르기 전에 해돋이를 보았다. 천왕봉에 도착해서 출렁이는 운해를 보고 놀랐다. 구름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아, 이래서 운해라고 부르는구나를 실감했다. 정상에서 느끼는 행복도 잠시, 이제 부지런히 내려가야 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설국》에서 시마무라는 무의 도식하며 모든 일이 다 헛수고처럼 여긴다. 자연과 자신에 대한 진지함을 잃기 일쑤일 때마다 그는 하는 일이 있다. 헛수고의 표본인 힘들게 산을 걷는 일이다. 시마무라는 한적한 온 전장에서 게이샤로 살고 있는 고마코를 만난다. 그녀의 방에는 열대여섯 살 무렵부터 읽은 소설을 일일이 기록해 둔 잡기장이 벌써 열 권이나 있다.

"감상을 써두는 거겠지?"

"감상 따윈 쓰지 않아요. 제목과 지은이, 그리고 등장인물들 이름과 그들의 관계 정도예요"

"그런 걸 기록해 놓은들 무슨 소용 있나?"

"소용없죠"

"헛수고야"

그녀에겐 결코 헛수고 일리 없는 것을 그가 알면서도 그는 아예 헛수고라고 못 박아 버린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가 오히려 순순하게 느껴진다. 덧없는 헛수고로 여겨지는 먼 동경, 고마코의 삶의 자세가 그녀 자신에게는 가치로서 꿋꿋하게 발목 소리에 넘쳐나는 것이리라.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소설의 첫 문장은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한다. 허무한 세계일 수도, 순수의 세계일 수도 있는 눈의 세계로.


며칠 전 오전 9시에 하늘이 뿌해지더니 눈이 펑펑 내렸다. 김소연의《시옷의 세계》는 펑펑 내리는 눈을 메우는 눈이라고 표현한다.

눈앞에 펼쳐진 허공을 엄청난 눈송이들이 메우고 있는데, 허공이 지독하게 광활하고 허해 보여 무섭기까지 했다. 함박눈이 쏟아져서가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던 허공이 그토록 허하고 광활했단 사실이 놀라워 아, 하고 신음과도 같은 탄성을 내뱉었다. 함박눈은 허공을 가시화하기 위한 잠깐의 신기루 같았다.

작가의 표현이  내가  상황이다. 그녀의 표현처럼 눈이 그렇게 무섭게 왔다. 그리고 금세 눈이 멈추고 쌓였던 눈도 신기루처럼 사라져 갔다. 허공을 메우기 위해 눈은 펑펑 내리고 바람은 사방에서 몰아쳤는데  모든  사라지다니 허무했다. 그녀는 금세 사라지고  것들에 렌즈를 들이대며, 금세 사라지고  것들을 부지런히 기록해두살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나른한 일요일, 오늘의 글쓰기를 생각하며 이런저런 생각에 방황하다가 불쑥 부질없다는 말을 맞닥뜨린다. 뭔가 손에 안 잡히고 마음이 불안해져, 김소연의《시옷의 세계》를 필사했다. 한참을 써 내려가다 보니 단어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어온다. 덧없는 눈을 통해서 덧없는 것들을 생각했던 그녀의 마음이 오롯이 느껴진다. 나 또한 오늘의 감정이 곧 사라지기 전에 기록한다. 기록은 그렇게 덧없음을 순수로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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