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쓰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심 Mar 21. 2021

첫 밥솥을 바꿀 때가 왔다

첫 밥솥

- 임솔아-


밥맛 좋은 밥솥을 받았다.

첫 밥솥이 있던 자리에

새 밥솥을 둔다.


새 밥솥은 감히 말을 한다.

취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맛있는 밥이 완성되었습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숫눈처럼 새하얀 밥을 덥석 물고 한 손으로는

떨어진 밥풀을 주워 다시 입에 넣어가면서 내가 나를 하얗게 지웠다.


멀쩡한 것들 옆에 첫 밥솥을 두고 돌아선다. 전파사에서 안고 걸어왔던 빨간 밥솥. 밥솥 중에서 가장 작았던 밥솥. 혼자 쓰기엔 조금 컸던 밥솥. 버튼이 하나뿐인 내 밥솥. 밥도 하고 죽도 쑤고 빵도 굽고 감자도 삶던 내 밥솥. 칙칙폭폭 기차 소리를 냈던, 어제를 통과하고 오늘을 통과하고 미지의 노선을 통과했던 첫 밥솥. 나는 매번 플랫폼에 미리 도착한 사람이 되었고 밥이 도착할 시간을 기다렸다.


밥 한 줌을 신에게 바치는 상인을 본 적이 있다. 바나나 잎에 밥과 꽃을 담아 대문 앞에 놓고서 향을 피우고 기도를 했다. 저녁이 끄덕 끄덕 넘어질 때 개가 천천히 다가와 그 밥을 먹었다. 밥풀을 먹으려 새까맣게 달라붙은 개미까지 싹싹 핥아 먹었다. 그때만큼은 잘 먹고 잘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덜 미워했다.


푸지게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밥알처럼 새하얀 눈송이들.


빨간 밥솥 옆에

빨간 주전자도 버려져 있다.




어제 저녁에 남편이 우리집 밥솥이 이상하다고 말한다. 수증기가 옆으로 빠져서 밥이 맛이 없다며 이번 기회에 밥솥을 바꾸자고 했다. 그러고 보니 똑같은 쌀인데 어떤 날은 밥이 찰지게 맛있고 어떤 날은 밥이 퍼석퍼석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밥을 하고 나면 남아있는 밥이 있을 때 전원을 끄는 습관이 생겼다. 보온을 오래 하면 밥이 말라서 딱딱해졌기 때문이다. 엄마도 가끔 밥솥이 이상하다고 얘기했었는데 그냥 그러려니 했었고, 밥솥을 새로 사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요. 알아서 구매해요". 남편은 몇 번의 검색을 하더니 상품평이 좋은 밥솥을 찾았다.  이제 슬슬 집에 가전제품을 바꿔야 할 시기인가 생각을 했고, 여전히 적극적으로 사야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오늘 아침 눈도 제대로 안 떠진 채 소파에 앉아서 TV 채널을 돌렸다. 어라 우리집 밥솥 바꿔야 하는 걸 어찌 알고 홈쇼핑에서 밥솥을 판매하고 있다. 신기한 일이지만 이런 일이 참 많다. 홈쇼핑 쇼핑호스트의 제품 소개를 초집중하여 듣는다. 


고객님 밥을 보온으로 했는데 하루도 아니고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밥이 마르고 딱딱해지면 이건 밥솥은 바꿔야 한다는 타이밍입니다. 

맞아 맞아. 우리 집 밥솥이 지금 이런 상태야.


요즘 같은 시기에 밥이라도 맛있게 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래. 매일 먹는 밥 맛있게 먹는 거 중요하지.


6인용과 10인용의 가격 차이가 만원밖에 안 난다면 당연히 10인용을 사는 게 맞습니다.

가격차이가 얼마 안 나면 이왕이면 큰 게 낫지.  혹시 손님이라도 올지 모르잖아. 


이미 나는 쇼핑호스트의 멘트에 고개를 끄덕이며 설득당하고 있었다. 디자인도 마음에 들고 올 스테인리스라고 한다. 방송하는 제품 모델을 찾아보고 남편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이 모델이 사고 싶어요. 언제 살거야?" 갑자기 밥솥이 빨리 사고 싶어 졌다.  남편은 이번 달은 카드실적을 다 채웠으니 다음 달에 사자고 했다. "그래요. 4월 1일 땡 하면 바로 주문해요".


오늘은 어떤 글을 쓸까 고민하던 중에 우연찮게 임솔아의〈밥솥〉이라는 시를 발견했다. 밥이 되어가는 칙칙폭폭 소리에 밥솥은 기차가 되고, 시인은 플랫폼에 미리 도착한 사람으로 밥이 도착할 시간을 기다린다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멀쩡한 것들 옆에 첫 밥솥을 두고 돌아선다" "빨간 밥솥 옆에 빨간 주전자도 버려져 있다" 부분이 마음에 걸린다. 우리집 밥솥도 그렇게 되겠지. 언제부터인가 새 물건을 사는 건 좋은데 지금 까지 사용했던 물건을 버리려고 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



* 상단 이미지 :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꿈에서 얻은 글쓰기 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