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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심 Jan 15. 2021

기다리다

도스토예프스키, 백야

기다림이라는 단어에는 오랫동안 여성이 많이 등장했다.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서 오뒷세우스의 부인 페넬로페는 남편을 20년을 기다린다. 서정주의 시〈신부〉에는 첫날밤에 자신을 두고 떠나버린 남편이 50년이 되어 돌아와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자 그제서야 재가 된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기다림이 끝날 것이라는 희망과 기다림을 계속 이어나가는 자신의 의지가 담겨있다.


한때 나는 일본 배우 기무라 타쿠야를 무척 좋아했다. 그가 나온 모든 드라마를 섭렵하고, 일본어까지 배울 정도로 열중했다. 그를 처음 알게 된 드라마는《프라이드》이다. 드라마 주제곡인 퀸(Queen)의 "I Was Born to Love You"도 좋고, 남녀 주인공인 기무라 타쿠야와 다케유치 유코가 잘 어울린다. 내용은 하키 선수 하루와 그가 소속된 회사에 다니는 아키의 사랑이야기이다. 하루(春)는 봄을 의미하고, 아키(秋)는 가을을 의미한다. 봄과 가을은 중간에 여름이 있어서 이어지지 않는다. 사실 아키는 남자 친구가 있고, 유학을 간 후 연락도 없는 남자를 다리에서 기다린다. 하루는 그녀를 지고지순한 여자라고 놀리지만 그런 아키가 좋고, 남자 친구가 돌아올 때까지 게임 연애를 하자고 한다.


하루와 아키는 점점 서로를 좋아하게 된다. 아키는 여전히 기다림의 장소인 다리에 간다. 어느 날 하루는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두 손을 내민다. 선물을 주겠다며 어느 손을 선택할 건지 묻는다. 갑자기 아키가 눈물을 보인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본 곳에 남자가 서있다. 아키가 우는 표정은 여러 감정이 얽혀있다. 하루는 그녀를 보내주고, 아키는 울면서 남자에게 걸어간다.


몇 년 전에 우리 집 책장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백야》를 발견했다. 남편이 산 책인 것 같다. 읽으면서 두 가지에 놀랐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이 이렇게 쉽게 읽히다니. 그리고 내용은 제방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한 여자와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단박에 드라마《프라이드》가 생각났다. 작가가《백야》의 소설을 읽고 썼는지 그냥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읽으면서 반가웠고 결말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이 소설의 화자인 나스첸카는 몽상가이고, 밤에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들이 휴가를 떠난 한적한 도시를 걷다가 우연히 제방에 서있는 한 여자를 발견한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다가 내일도 같은 시간에 이곳에서 만나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는 좋다고 이야기하고 한 가지 조건을 건다. 절대 자신을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다음날 같은 시간에 그곳에서 둘은 만나고 서로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는 한 남자를 기다리고 있다. 모스크바로 떠났고, 이 도시에 돌아오면 그녀를 만나러 오겠다고 약속했던 남자. 그는 이 도시에 이미 돌아왔지만 아직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나스첸카는 기다리지만 말고  남자에게 편지를 보내보라고 권유하고, 그녀는 편지를 주며 나스첸카에게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답장을 기다리지만 답장은 없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의 마음이 복잡해지고 절망빠진다. 그녀는 이제 나스첸카가 눈에 보이고 나스첸카와 함께 하고 싶다고 말한다. 나스첸카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그녀의  앞에 서있는 남자를 발견한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뿌리치고, 그를 향해 총알처럼 달려갔다. 나스첸카는 무엇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서 그들을 바라본다.


다음날 나스첸카는 그녀에게서 편지를 받는다.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해달라고... 그는 편지를 읽고 나서 15년 뒤에 쓸쓸히 늙어갈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자신을 모욕한 그녀를 비난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지만 그는 그럴 수 없다. 그는 그녀에게 행복과 기쁨의 순간에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길 빈다. 한 순간이지만 지극한 행복을 느꼈고, 그것이 결코 부족함 없는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스첸카와 그녀와 만남은 백야가 시작되는 날부터 네 번째 밤까지이고 짧은 이야기이다. 밤마다 그녀와 헤어지면서 그는 "내일 다시 만나요!"라고 이야기한다. '내일 다시 만나요'에는 내일을 기대하는 행복한 기다림이 담겨있다. 아주 짧았던 시간이었지만 그는 행복했다. 그래서 그가 더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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