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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심 Jan 23. 2021

고갱을 생각하다

`나는 당신을 보지 못하오. 당신과 헤어지기로 마음 먹었고. 내일 아침 파리로 떠날 작정이오. 이 편지는 그곳에 도착하는 대로 부치겠고. 다시 돌아가지는 않소. 결정을 번복하지 않겠소.


서머싯 몸의《달과 6펜스》를 읽고 있다. 어느 날 어떠한 설명도 없이 남편이 편지만 남겨놓고 집을 나갔다면 기분이 어떨까. 이 소설은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하고 있다. 몸은 오랫동안 화가를 소재로 소설을 쓰고 싶었고, 파리에 머물면서 타히티에서 비참하게 죽은 고갱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그는 독특한 화법으로 내면세계를 탐구하던 고갱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실제로 고갱이 아내에게 편지 한 장을 남기고 파리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떠난 것은 아니다.


고갱은 오랫동안 증권맨으로 살았다. 조원재의《방구석 미술관》에 보면 그는 평일에는 회사를 다니고 주말이 되면 파리 근교로 나가 그림을 그렸다. 20대 중반에 카미유 피사를 만난다. 이 사람은 인상주의 원년 멤버이고 조르주 쇠라와 폴 세잔의 스승이다. 고갱은 카미유 피사의 도움으로 1879년 네 번째 인상주의 전에 작품을 전시하게 되고 화가로 인정을 받는다.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증권맨과 화가의 삶 중에서. 가족을 위해 경제적으로 안정된 증권맨을 택하지만, 여전히 화가의 삶을 꿈꾼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 경기가 급격한 불황을 맞게 되자 그는 증권회사에서 해고를 당한다. 해고를 당하지만 고갱은 오히려 기뻐한다. 그는 이중생활을 하면서 계속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었을 거고, 적절한 때가 왔다. 이제 그는 화가의 길을 걷는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그림이라는 것을 알았고, 일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어찌 보면 그는 미래를 준비한 퇴사 선배라 할 수 있다. 직장인으로서 부러운 지점이지만 그가 실제로 퇴사하자마자 화가의 길을 가겠다고 결정하지 못했을 거다. 그 길은 화가로서 성공할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고, 경제적으로도 힘들기 때문이다.《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고갱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을 듯하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요.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고갱은 고흐의 제안으로 아를에서 함께 잠시 지낸다. 곰브리치의《서양미술사》에 둘은 성격이 너무 달랐는데 고갱은 오만하고 고흐는 겸손하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성인이 된 이후에 그림을 시작하고 거의 혼자서 그림을 공부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인상주의는 사물이 주는 순간적인 빛을 포착하여 그림으로 표현한다. 고전주의와는 달리 윤곽선을 정확하게 그리지 않고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색깔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이 시기에 사진기의 등장으로 초상화가들이 생계를 위협받고 미술계에서는 새로운 구도와 화법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들은 정통 고전주의 화법을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 배우고 익혀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마침내 고갱은 서른여섯 퇴사한 지 3년 만에 예술과 인생의 방향을 잡는다. "원시와 야생". 그래서 그는 타이티에서 원주민의 삶을 살려고 했고, 그 속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예술을 펼쳤다.


고갱은 괴팍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리고 "원시와 야생"을 표현한 그의 작품 세계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고, 그가 동생 테오에게 보냈던 수많은 편지를 통해 인간 고흐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고갱을 주목하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고, 일과 병행하면서 그림 실력을 키웠다는 점이다. 또한 안정적인 삶을 버리고 화가의 삶을 선택한 용기가 대단하다. 독학으로 독특한 자기 세계를 구축했다는 점도 높이 살만하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보며 나 스스로에 묻는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싶은가.




* 상단 이미지: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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