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3가지 전략.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이 막 시작된 1939년 9월 1일의 이른 새벽, 폴란드의 전쟁터와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영국 런던 교외의 시골 마을 차트웰. 창밖으로 호수가 바라다보이는 어느 별장 저택 거실 소파에 머리가 벗겨진 퉁퉁한 몸집의 60대 노인이 몸을 푹 누이고 앉아있습니다.
유리컵에 든 브랜디를 홀짝 거리는 그의 다른 쪽 손은 탄환이 장전된 권총 손잡이에 올려져 있습니다. 소파에는 역시 언제든 쏠 수 있게 총알이 장전된 사냥용 라이플이 기대어 있습니다.
한적하기 그지없는 시골의 밤이었지만 노인의 표정엔 긴장과 고뇌로 인한 깊은 피로가 가득했습니다. 밖에서 사그락 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는 일일이 몸을 일으켜 창문 밖을 살폈습니다. 혹시나 누가 쳐들어올까 경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잠시 뒤 런던 경찰청 형사 출신인 퇴직 경찰관 톰프슨 경위가 역시 권총을 손에 든 채 거실로 들어왔습니다.
“밤이 많이 늦었습니다. 이제 들어가서 쉬시죠. 지금부터는 제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손에 든 브랜디를 마저 목에 털어 넣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침실로 쉬러 가는 이 남성의 이름은 윈스턴 처칠이었습니다. 예, 맞습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일으킨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에 맞서 연합국의 승리를 이뤄낸 그 처칠입니다.
영국 수상의 자리에 올라 5년 동안 전쟁을 이끈 그였지만 전쟁이 터지던 그 순간까지 그는 수백 명의 하원의원 중 한 명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히틀러가 가장 두려워하던 인물이었습니다.
만약 처칠이 정부 내각에 들어가 전쟁을 지휘하게 되면 그 이전까지 영국 정부가 보였던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죠.
처칠이 과거에 자신을 경호해줬던 퇴직 경찰관과 둘이서 교대로 보초를 섰던 건 히틀러가 자신을 암살하기 위해 영국 안에서 활동하는 나치당 당원들을 보낼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처칠 역시 일단 전쟁이 시작되고 나면 영국이, 아니 전 유럽, 전 세계가 자신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경제경영 해설사 홍선표 기자입니다. 오늘은 <처칠이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3가지 비결. 그가 전쟁을 이끌게 되자마자 통계학자와 경제학자를 고용한 이유는?>이라는 제목으로 히틀러의 나치 독일을 제압하고 연합국의 승리를 만들어낸 윈스턴 처칠의 경영 전략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으신 분들이더라도 윈스턴 처칠이란 이름은 들어보셨을 텐데요. 그에 대해 조금 더 알고 계신 분들이라면 항상 입에는 시가를 문 채 나비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으로 중절모를 쓰고 있는 처칠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실 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2차 세계대전 무렵의 역사에 대해 알고 계신 분들이라면 그가 수상이 돼서 전쟁을 지휘하기 시작했던 무렵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웨이, 폴란드 등 유럽 전역은 이미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해 점령을 받고 있었고, 오로지 바다 건너 영국만 홀로 남아 외로운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오늘은 멸망 위기에 놓인 국가의 지도자가 돼서 5년 동안 수많은 위기를 겪어내며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처칠의 리더십과 경영 전략에 대해서 다뤄보겠습니다.
처칠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뛰어난 작가였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면 많은 분들이 깜짝 놀라시는데요. 아무래도 험상궂은 불독을 닮은 그의 외모가 노벨문학상 수상자에게 기대하는 지적인 이미지와는 들어맞지 않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집필했고 수십 년 동안 생활비의 대부분을 책을 팔아서 번 인세와 언론사에 칼럼을 기고하고 받은 원고료, 그리고 강연을 하고 받은 강연료로 마련했던 프로페셔널 작가였습니다.
1953년 노벨상위원회는 그가 쓴 책들과 그가 전쟁 중에 했던 연설의 문학적 가치를 인정해 처칠에게 노벨 문학상을 주는데요.
처칠이 2차 세계대전을 치러낸 자신의 경험을 정리해서 펴낸 모두 6권으로 이뤄진 <2차 세계대전>이 특히나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번 글 역시 그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밝혔던 경험과 생각, 고민을 바탕으로 합니다.
먼저 ‘추측과 감이 아닌 정확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첫 번째 전략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처칠은 전쟁이 터진 지 나흘 뒤인 1939년 9월 5일 해군부 장관으로 임명되며 전쟁을 지휘할 영국 정부의 지도부에 합류합니다. (의원내각제인 영국에서는 의원들이 정부 내각의 각료, 즉 각 부처의 장관을 맡아 각 정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 10여 년 동안은 하원 의원이긴 했지만 정부 내각에서 각료(장관 등)로 일하지는 못했었습니다. 거물급 정치인이긴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그저 수백 명의 의원 중 한 명에 불과했었습니다.
사실 처칠은 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해군부 장관으로 일하며 수년 동안 영국 해군을 지휘한 경험을 갖고 있었습니다. 1908년부터 1925년까지 해군부 장관을 비롯해 상무장관, 군수장관, 공군장관, 육군장관, 식민지부 장관, 재무장관 등 여러 직책을 거치며 화려한 경력과 풍부한 경험을 쌓아나갔습니다.
그가 1940년 5월 수상 자리에 오르자마자 빠른 속도로 국내 정치 상황을 안정시키고, ‘덩케르크 철수 작전’ 같은 영국의 운명이 걸린 군사 작전을 단호하게 결정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경험 덕분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처칠은 ‘준비된 전쟁 지도자’와 같은 존재였던 건데요.
하지만 전쟁이 터지기 전 약 15년 동안 그는 권력의 핵심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이 시기 동안은 정부 각료로 활동하지 못한 채 그저 한 명의 의원에 머물렀으니까요. 전쟁이 터진 며칠 후에 임명된 해군부 장관직은 그가 약 15년 만에 다시 맡게 된 각료 자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긴박한 시기에 영국 해군을 책임지게 된 그가 장관직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장 해군 제독들을 불러 어떻게 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 전략을 논의했을까요? 아니면 직접 함대를 몰고 전선에 나가 독일군의 움직임을 눈으로 관찰했을까요? 해군 기지를 돌며 처칠 특유의 명연설로 해군 장병들의 사기를 끌어올렸을까요?
모두 아닙니다. 처칠이 영국 해군을 이끌게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여섯 명의 통계학자와 경제학자를 고용한 일이었습니다. 이들을 고용한 뒤에는 이들에게 모든 군사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처칠은 자신의 책에서 “해군부를 책임지고 전쟁내각 각료가 됨으로써 내가 해야 할 임무의 첫 단계는 나 자신의 전략 전문 팀을 만드는 것이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뽑은 통계학자와 경제학자에 대해 ‘오직 실질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는 믿을 만한 인물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처칠이 해군부 장관이 되자마자 통계학자와 경제학자를 고용하고 그들에게 군사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편견, 희망, 공포, 분노 등 감정에 물들지 않은 객관적인 정보를 얻고 이를 합리적으로 분석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통계학자와 경제학자는 어지럽게 널려있는 숫자들을 한데 모아 분석한 뒤 객관적인 사실을 밝혀내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입니다. 처칠이 뽑은 통계학자와 경제학자들은 해군부 본부 이곳저곳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서류 뭉치들을 헤치며 그 안에 조각조각난 채 흩어져있던 정보들을 하나로 모으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이렇게 정보를 모은 다음에 그 내용들을 통계기법을 활용해 분석해 현재 전쟁이 어떤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적과 비교했을 영국과 연합국은 어떤 부분에서 강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 약한지를 보여주는 정리된 자료를 만들어냅니다. 이 자료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도표와 그래프, 도형으로 작성해 처칠에게 건네는 게 이들의 임무였습니다.
영국 해군이라는 거대 조직을 이끄는 처칠에게 두툼한 보고서를 한 장 한 장 읽어나갈 시간은 없었습니다. 현재 상황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시각 자료가 필요했던 것이죠.
명확한 기준에 따라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정보는 그 양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저 종이뭉치에 불과하다는 게 처칠의 생각이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같은 기준으로 놓고 비교할 수 없는 정보 그리고 다른 상대와 나를 객관적으로 비교하는 데 사용할 수 없는 정보 역시 큰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고요.
2차 세계대전 당시만 해도 영국 정부 안에는 통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부서가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국가를 운영할 때 정확한 통계 정보를 갖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통계청과 같은 별도 통계 전담 부처를 두고 있는데요.
80년 전에는 강대국 중 하나였던 영국조차도 통계 정보의 중요성에 대해 별달리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정부 안에 통계를 전문으로 다루는 부서와 인력이 없기 때문에 같은 영국 정부에서 나온 통계 자료라고 하더라도 어느 부서에서 만들었는지에 따라 통계의 기준과 용어 등이 제각각이었습니다. 처칠은 이 같은 현실에 대해 “공군부의 계산과 육군부의 계산이 달랐다. 조달부와 상무부는 같은 것을 의미하는 데도 다른 용어를 사용했다”고 꼬집었습니다.
같은 상황을 두고도 어떤 기준을 사용해 조사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통계 결과가 나오고 같은 내용을 놓고도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해 표현했던 거죠. 이래서는 정부 부처 간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지요.
처칠은 이에 대해 “(통계 기준이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은 탓에) 내각 내부에서 특정한 핵심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가끔 오해를 빚고 시간을 낭비했다”고 말했는데요.
그가 해군부 장관을 맡으며 가장 먼저 통계학자와 경제학자들을 고용한 데는 통일된 통계 기준을 만들어서 정부 부서끼리 같은 내용을 두고도 서로 다른 용어로 표현하느라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조직 구성원 모두가 같은 기준, 용어를 바탕으로 말해야만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죠.
처칠이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될 수 있었던 두 번째 비결로는 첨단 과학과 공학기술, 그리고 기술이 바꿀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고민했던 그의 태도를 들 수 있습니다.
보통 정치 지도자로서 처칠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면 영국 국회의사당 연단에 서서 강렬한 연설을 토해내거나 아니면 라디오 방송을 통해 영국 국민들을 하나로 모으는 감동적인 연설을 내보내는 모습이 먼저 떠오르는데요. 이런 뛰어난 연설가로서의 모습과 함께 처칠은 과학과 공학기술에 깊은 관심을 갖는 ‘엔지니어’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의 결전을 앞둔 영국의 아킬레스건은 바로 취약한 공군력이었습니다. <다키스트 아워>처럼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국을 다룬 영화를 보면 독일 폭격기가 런던 상공에 나타나 도시 곳곳을 폭격하고, 시민들은 살기 위해 피해 온 힘을 다해 방공호로 달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영국의 수도인 런던까지 독일 폭격기들이 나타나 폭탄을 퍼부을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영국의 공군력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처칠은 전쟁이 터지기 전, 몇 년에 걸쳐서 영국 정부가 하루라도 빨리 공군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주장했습니다. 유럽 대륙과 떨어져 있는 섬나라이고 또 해군력만큼은 어느 나라와 겨루더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바다를 건너오는 독일 해군과 그들이 실어 나르는 육군의 침공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국 공군의 보유한 전투기, 폭격기의 성능과 그 숫자는 독일 공군에 비할 바가 못됐는데요. 압도적인 화력을 보유한 독일 공군이 영국의 주요 도시와 군수 공장, 군사 기지들을 마음껏 폭격하게 놔둔다면 영국으로선 전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처칠이 수년 동안 계속해서 공군력 확충을 주장했던 건 이 때문이었는데요. 하지만 히틀러와 평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있던 당시 볼드윈-맥도널드 정권은 처칠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공군력 확충은 전쟁이 벌어질게 확실시되고서야 추진됐고요.
보통의 정치인이었다면 정부가 곧 다가올 대재앙을 눈앞에 두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모습에 절망했을 텐데요. 하지만 처칠은 달랐습니다. 그는 일단 자기 혼자서라도 독일 공군이 공습을 해왔을 때 어떻게 막아낼 수 있을지를 연구하는데요.
처칠은 1930년대부터 지상에 있는 장비로 적의 전투기와 폭격기를 물리칠 수 있는 방법, 군사용어로는 대공 방어라 불리는 전술을 공부해나갑니다. 그에게 대공 방어 전술과 현대전의 과학적 전술에 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준 이가 프레더릭 린데만이었는데요.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경험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였습니다.
철학과 교수가 대공 방어 전술과 현대전 전술에 대해 가르쳐줬다고 하면 의아하게 생각하실 분이 많으실 텐데요. 린데만 교수는 1차 세계대전에는 영국 공군의 파일럿으로 참전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공군이 실행했던 여러 위험한 비행 실험에 참여해 조종사로서 명성을 떨쳤던 인물입니다. 군에서 나온 이후에도 꾸준히 군사 전술을 연구해왔고요.
린데만 교수와 교류하며 대공 방어 전술 등에 대해 꾸준히 공부해온 경험 덕분에 처칠은 전쟁 지도부에 합류한 후 독일 공군에 맞서서 영국 국민들을 최대한 지켜낼 수 있는 전술을 신속하게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대공 방어 전술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영국군이 갖고 있는 장비와 인력이라면 독일 공군에게 완벽하게 무너지지는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 확신이 없었다면 독일에 휴전을 제의할 수밖에 없었겠죠. 국민들을 폭격기의 폭격 앞에 무방비 상태로 놓아둔 채 전쟁을 이끌어갈 수는 없으니까요.
처칠의 전문 지식이 빛을 나타낸 분야는 특히 해군과 관련된 영역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는 1911년부터 1915년까지 해군부 장관으로 일하며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을 이끌었던 경험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덕분에 그는 함대와 해군의 특성, 해전의 전략에 대해서 깊은 지식을 갖게 됐는데요.
해군 장관에서 물러난 뒤에도 해군 지휘부와 꾸준히 교류하면서 함선에 도입되는 최신 기술과 새롭게 등장한 무기 체계, 해전의 전술 변화 동향에 대한 지식을 계속해서 쌓아나갑니다.
처칠은 자신의 이 같은 노력에 대해서 “사임 후에도 해군 문제와 관련하여 연구도 하고 글도 썼다. 하원에서도 그 문제(해군 관련 문제)에 대해서 여러 차례에 걸쳐 발언했다. 항상 해군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 시절 나는 가장 엄격한 비판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비밀 사항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대영제국은 해군을 바탕으로 전 세계를 움켜쥐었던 국가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영국의 해군력은 세계 최강으로 평가받았으며 해군이야말로 나치 독일에 맞서서 영국을 지킬 수 있었던 가장 큰 방패이자 칼이었습니다.
최고 지도자가 이처럼 국가의 가장 큰 무기인 해군에 대해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었던 건 영국이 전쟁 초기의 열세를 뒤엎고 결국 독일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실제로 처칠은 탱크를 실은 배(상륙용 함정)를 해안에 상륙시키고, 그 뒤에 곧바로 탱크가 박차고 나가 적을 향해 돌격해나가는 상륙 전술을 구상하고 이를 위한 함정과 장비 개발을 지시했는데요. 이 같은 수륙양면 전술은 이미 처칠이 1차 세계대전인 1917년부터 머릿속에 품고 있던 전술이었습니다.
탱크와 병사들을 실은 수많은 상륙용 함정이 빗발치는 적군의 총탄과 포화를 뚫고 해안에 도착한 뒤 그 안에서 탱크와 병사들이 쏟아져나가 적을 향해 돌격하는 모습. 이런 장면을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전투가 있는데요.
하나는 2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결정지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고요. 다른 하나는 6‧25 전쟁 당시 밀리기만 하던 국군과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승기를 잡을 수 있게 해 준 인천 상륙작전입니다.
이 같은 대규모 상륙작전을 처음 구상하고 이를 위해서 국가의 자원을 총동원해 탱크 상륙용 주정(L.C.T : Landing Craft Tank)와 탱크 상륙용 함정(L.S.T : Landing Ship Tank)을 건조했던 게 바로 처칠이었습니다.
최고 지도가 최신 기술과 그런 기술이 바꾸는 경쟁 환경에 대해서 항상 공부하고 연구하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처칠은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관련해 “탱크의 상륙을 위해서 방대하게 준비하고, 함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또 거기에 권한을 동원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처칠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세 번째 비결로는 ‘리더의 감정은 조직 전체에 급속도로 전염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을 들 수 있습니다.
태풍이 불어와도 끄떡하지 않을 것 같은 외모, 불굴의 의지를 담은 연설, 강력한 리더십처럼 겉에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처칠은 평생을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처칠의 책을 보면 그가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캔버스와 팔레트, 물감, 붓을 챙겨서 한적한 시골마을에 가서 그림을 그렸다는 걸 알 수 있는데요. 실제로 처칠의 그림 실력은 아마추어 화가의 실력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처칠이 이처럼 그림에 취미를 붙이게 된 이유는 그림을 그릴 때면 자신의 마음을 삼키려 드는 우울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적의 군홧발에 짓밟힐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한 국가의 지도자라는 자리는 평생 우울증에 시달려온 60대 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자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독자분들도 모두 아시다시피 처칠은 그 누구보다도 성공적으로 위기에 처한 국가를 이끌었고 결국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을 이끌던 시기 그는 단 한순간도 ‘패배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겉으로 드러낸 적이 없었는데요. 최고 지도자인 자신이 단 한 번이라도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국민들 사이로 불안함과 패배감이 급속도로 퍼져나갈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웃는 얼굴로 자신감에 찬 태도를 보이라”는 게 처칠의 말입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사진을 찍을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포즈가 있습니다. 바로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을 세워서 브이(V) 자를 만드는 포즈인데요. 이 V자 포즈가 오늘날처럼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데는 처칠의 공이 컸습니다.
대중들 앞에 나서서 사진을 찍힐 때마다 그는 손가락 두 개를 펴 들며 V자 포즈를 취했는데요. 여기서 V는 Victory, 승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꼭 승리한다는 뜻의 V자 포즈와 함께 활짝 웃는 표정의 처칠의 사진은 영국 국민은 물론 히틀러와 맞서 싸우고 있는 연합국 국민들 모두에게 ‘우린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줬고요.
최고 지도자의 표정, 몸가짐, 말 한마디가 조직 구성원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죠.
처칠이 국민들에게 긍정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사용한 또 다른 중요한 수단은 라디오 연설이었습니다. 독일 공군의 폭격이 한창이던 시기 처칠은 라디오 방송에서의 연설을 통해 국민들에게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몸소 불어넣었습니다.
처칠이 라디오 방송에 나가서 했던 연설의 대부분은 그가 직전에 의회에 나가서 했던 연설을 그대로 다시 반복하는 내용이었는데요. 의회에서 했던 연설들도 신문과 같은 언론매체를 통해서 국민들에게 그 내용이 전달됐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전쟁을 치르고 있던 그 같은 비상 상황에서는 리더가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국민들에게 들려주는 게 꼭 필요하다는 게 처칠의 생각이었습니다. 활자를 통해 읽는 것과 직접 지도자의 목소리를 듣는 건 그 차이가 크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이번 글에선 윈스턴 처칠의 책 <2차 세계대전>을 바탕으로 처칠이 멸망의 위기에 처했던 영국을 구해내고 결국 히틀러를 꺾고 승리할 수 있었던 전략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그 내용들을 다시 옮겨보면 다음과 같은데요.
사실 처칠과 그가 이끌었던 연합국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을 단순히 이 세 가지로만 정리할 수는 없습니다. 전 세계가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눴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을 단 세 가지로만 요약할 수는 없죠.
저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처칠의 전략을 세 가지로 정리해본 건 저 전략들이야말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과 자신이 일하고 있는 조직에 정리해볼 수 있는 내용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이 독자님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기를 바라면서 이번 글은 여기서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처칠이 전쟁을 이끌던 5년 동안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숨겨진 이유가 알고 싶으시다면 아래 글을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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