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안녕하세요. 홍선표 기자입니다. 며칠 전 <처칠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3가지 전략>이라는 제목으로 블로그에 글을 쓰고 유튜브 동영상을 만들어 올렸습니다. 윈스턴 처칠이 전쟁 이 터진 지 나흘 만에 해군부 장관으로 임명돼 영국의 전쟁 지휘부에 합류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여섯 명의 통계학자와 경제학자를 고용한 일이었다는 내용을 설명드렸는데요.
그만큼 그가 추측, 감, 경험이 아닌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걸 중요하게 여겼다는 내용이었죠.
이와 함께 그가 대규모 상륙작전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군사전술을 구상하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무기 개발에 전폭적인 지원을 했을 정도로 과학과 공학 기술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내용도 말씀드렸죠. 평생을 우울증에 시달려왔지만 전쟁을 치르는 내내 국민들 앞에서는 항상 자신감 있는 표정과 승리에 대한 확신을 보였다는 점에 대해서도 설명드렸습니다.
지난 글에선 이 같은 세 가지 전략이 처칠이 유럽 대부분이 나치 독일에 점령된 상황에서도 결국은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설명드렸는데요. 이번 글에서는 그가 수상(총리)으로서 약 5년간 영국을 이끄는 내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한 가지 숨은 이유에 대해서 말씀드리려 합니다.
꼭 말씀드리고 싶었던 내용은 지난 글에서 분량이 너무 길어질 거 같아서 말씀드리지 못했었습니다. (지난번 글과 유튜브 동영상 링크는 본문 하단에 마련해뒀습니다.)
처칠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1년이 지난 1940년 5월 10일 수상의 자리에 오르는데요. 그 이후 1945년까지 수상으로서 영국 정부를 이끌었습니다. 그 5년 동안 유럽에 출진했던 영국 원정군 30여만 명을 다시 영국으로 귀환시키는 덩케르크 작전을 지휘했고요. 영국 본토에 대한 독일 공군의 무자비한 공습을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통해 독일의 허를 찌르고 전쟁의 승기를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결국 연합국의 승리를 만들어냈고요.
멸망하기 직전까지 갔던 나라를 되살려낸 것은 물론 절대 무너뜨릴 수 없을 것만 같던 강대한 적을 결국은 꺾어낸 게 오늘날까지 처칠이 존경받는 이유인데요. 이 같은 업적만을 놓고 보면 그가 원래부터 타고난 위대한 지도자이고, 수상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많은 이들의 신망을 받던 리더라고 생각하기 쉬우실 텐데요.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처칠이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5년 동안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전쟁이 벌어지기 10여 년 동안 권력의 핵심에 들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이 맹렬한 기세로 전쟁을 준비하던 시기에 그는 영국 정계의 변방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 점이 나중에 그가 영국 지도부에 합류하고 결국 수상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이 되는데요. 또 그가 수상이 돼서 강력한 리더십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지금부터는 어떻게 권력의 변방에 머물렀던 경험이 강한 리더십의 이유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처칠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해군부 장관에 오르기 전까지 10여 년 동안은 정부 내각의 각료 자리에 오르지 못한 채 그저 한 명의 하원의원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서른네 살이던 1908년에 상무장관이 된 후 1911년엔 해군장관에 임명돼 1차 세계대전 당시 수년 동안 영국 해군을 이끌었습니다. 또 그 이후에는 군수 장관, 공군장관, 육군장관, 식민지부 장관, 재무장관까지 올랐던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정부 예산을 어디에 쓸지를 결정하는 재무장관은 오늘날에도 영국 정부 안에서 수상 다음의 자리로 여겨지는 2인자의 자리죠.
하지만 1925년에 재무장관에 오른 뒤에는 1939년 다시 해군부 장관에 오르기까지 약 15년간 정부 내각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수백 명의 하원 의원 중 한 명에 불과했을 뿐이죠. 물론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친 덕분에 풍부한 인맥과 경험을 갖고 있는 거물급 정치인이었던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의 공식적인 지위는 그저 하원의원이었을 뿐인데요.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회의에 참여하고 정부 부처와 군대의 운영을 책임지는 내각의 각료(장관)와 평범한 하원의원은 그 무게감에서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요. 처칠은 10여 년 동안 내각에 참여하지 못한 채 의사당 의석에만 앉아있어야만 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원 오브 댐(One of Them·여러 명 중에 한 명에 불과한 평범한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었을 뿐이죠.
30대 중반의 나이에 당시 세계 최강으로 꼽히는 영국 해군을 이끌고 1차 세계대전을 치러낸 처칠로서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떨어졌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을 텐데요. 오늘날의 직장인으로 치면 한창 회사에서 잘 나가다가 한직으로 좌천된 것과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렇게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 있던 이 10여 년의 기간이 처칠이 훗날 역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기는 위대한 지도자로 남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됩니다.
명배우 게리 올드만이 처칠 역을 맡아 뛰어난 연기를 보여줬던 영화 <다키스트 아워(Darkest Our)>를 보신 분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처칠 직전의 수상이었던 체임벌린은 히틀러 그리고 나치 독일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에 대해 망설이는 모습을 보입니다.
영화에서는 처칠이 그렇게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는 체임벌린과 내각 각료들에게 “호랑이 입에 머리를 처넣은 채 호랑이와 협상을 할 수는 없다”라고 소리치는 장면도 나오는 데요.
그런데 사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던 독일이 히틀러의 지휘 하에 빠른 속도로 군대를 늘려나가고 결국 그 힘을 활용해 전 유럽을 정복할 수 있었던 책임은 체임벌린 정부 전에 약 10년간 집권했던 볼드윈-맥도널드 정부의 책임이 훨씬 큽니다. 체임벌린 정부는 이미 히틀러의 야욕이 뚜렷이 드러난 직후에 집권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나치 독일에 대한 군사적 조치를 준비했던 정부이기 때문이죠.
1930년대부터 1940년대에 걸쳐 10여 년 간 집권했던 볼드윈-맥도널드 정부는 빠른 속도로 무력을 키워나가면서 침략에 대한 야욕을 서서히 드러내던 나치 독일의 움직임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는 정권입니다.
그리고 처칠은 이 시기에 정부 내각의 각료로 참여하지 못한 채 권력의 중심부에서 빗겨서 있었습니다. 처칠의 시각에서 봤을 때 이 시기는 무분별하고 무책임하며 나약한 이른바 ‘평화주의자’들 때문에 처참한 전쟁을 막을 수 있었던 수많은 기회를 날려버렸던 시기였습니다.
볼드윈-맥도널드 정부가 집권하던 당시 처칠은 그저 한 명의 하원의원에 불과했었는데요. 이 시기에 처칠은 히틀러의 야욕에 대해 경고하고 영국과 연합국이 미래에 발생할 더 큰 전쟁을 막기 위해 독일에 대해 무력 수단의 활용을 비롯한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하원의원이었던 만큼 의사당 연단에 올라 수없이 많은 연설은 한 것은 물론이고요. 신문 기고글과 강연을 통해서도 히틀러의 야욕과 곧 벌어질 참혹한 전쟁의 위험에 대해서 10여 년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다녔습니다.
‘히틀러와 같은 전체주의 독재자와는 결코 협상으로 평화를 이뤄낼 수 없다. 독일의 무력 행동을 계속 지켜보기만 할 경우 자신감을 얻은 독재자가 온 유럽을 대상으로 한 참혹한 전쟁을 벌이게 될 거다’라는 게 처칠의 생각이었고요. 그의 예상은 결국 현실이 됐습니다.
처칠은 하원 의원으로서 히틀러의 침략전쟁에 대해서 경고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유럽 주요 국가를 돌아다니면서 각 나라의 지도층은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위험성에 대해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지, 그리고 실제로 전쟁이 터지게 된다면 전쟁의 승패가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해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다녔는데요.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전쟁 지휘부로서 활약했던 거물급 정치인이었던 그는 유럽 여러 나라의 지도층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두터운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요. 덕분에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몇 년 전에는 프랑스군 장군의 안내를 받아 프랑스군과 독일군이 서로 맞대고 있는 전선을 직접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독일을 방문했을 때에는 히틀러와 1대 1로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있을 수 있는데요. 이 만남은 막판에 취소됐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숙적인 처칠과 히틀러는 둘이 직접 얼굴을 맞대고 만난 적이 없는데요.
만약 이때 처칠과 히틀러의 만남이 이뤄졌더라면 둘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관계였던 이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서 어떤 인상을 받았을지가 궁금하네요.
이렇게 직접 전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유럽 각 나라가 처한 정치적 상황을 확인함과 동시에 처칠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활용해 히틀러의 전쟁 계획과 독일의 군비 증강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합니다.
그는 내각 각료에서 물러난 뒤에도 영국은 물론 다른 국가들의 정치 지도자, 고위 관료, 고위 장성들과 꾸준히 교류해왔는데요. 이들을 통해서 평범한 하원의원에게는 전해지지 않는 각종 고급 군사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보들을 접하면 접할수록 처칠은 히틀러가 곧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지금 이 글에서 다루는 처칠을 비롯해 빌 게이츠, 손정의, 앙겔라 메르켈, 레이 달리오, 이나모리 가즈오 등 자신의 힘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놓은 탁월한 리더와 뛰어난 기업가들의 전략을 쉽게 분석해서 내 삶에 적용하도록 돕는 <내게 유리한 판을 만들라>이 출간됐습니다)
처칠은 이와 관련된 일화를 자신의 책 <2차 세계대전>에서 설명하고 있는데요. 어느 날 처칠이 머물고 있던 별장을 찾은 정부 고위직에 있던 친구가 그에게 “독일은 매년 군비에 10억 파운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습니다. 이 액수는 영군의 군사비를 크게 뛰어넘는 액수였는데요.
이 말을 듣고 독일이 전쟁 준비에 이처럼 공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영국 의회와 국민들에게 알려야겠다고 결심한 처칠은 독일의 실제 국방비가 얼마나 되는지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데 나섭니다.
재무·회계 전문가가 아닌 처칠이 복잡한 숫자들로 가득한 독일 정부 예산안을 직접 분석하는 건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었는데요. 또 자신들이 군대에 얼마나 많은 돈을 쓰고 있는지가 외부에 알려지는 걸 꺼리는 독일 정부가 정부 예산안을 최대한 알아보기 힘들게 복잡하게 꾸며서 발표했기 때문에 이를 하나하나 분석하기 위해선 전문가의 도움이 꼭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처칠은 두 가지 경로를 통해서 독일 정부 예산안에 대한 분석을 전문가들에게 부탁하는데요. 우선은 재무와 회계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추고 있는 두 명의 독일 망명자들에게 독일 정부의 군사비에 대한 분석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유니언 코퍼레이션이라는 대기업을 이끌고 있던 자신의 친구에게 부탁해 그 회사 재무·회계 담당 직원들로 하여금 몇 주에 걸쳐서 독일 정부의 예산안을 샅샅이 살펴보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양쪽 모두로부터 독일이 1년에 군사비로만 10억 파운드를 쓰고 있다는 결과를 받아볼 수 있었는데요.
독일의 군사비에 대한 정확한 분석 결과를 얻은 처칠은 의회 의사당에 나가 정부 각료들에게 이에 대해서 따져 묻고 또 동료 의원들과 국민들에게 독일이 이처럼 전쟁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여기서 한 가지 여담으로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처칠은 정확한 분석을 통해 독일의 연간 군사비가 10억 파운드에 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공개 석상에서 말할 때는 ‘독일이 매년 8억 파운드의 군비를 사용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독일로 하여금 ‘처칠이 100%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라고 자신의 정보력을 과소평가하게 만들기 위해서였죠. 자신이 100%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독일이 생각하게 된다면 그 이후부턴 그들이 비밀 유지에 더 신경을 쓰고, 자신을 더 경계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항상 자신의 행동이 적에게는 어떻게 비칠지를 고려하는 이런 치밀함 역시 처칠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일 겁니다.
지금껏 말씀드렸던 것처럼 처칠은 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 약 10년에 걸쳐서 줄기차게 전쟁의 위험을 경고하고 오늘부터 당장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목이 터져라 외칩니다.
지금 군대를 움직여 나치 독일에 대해 경고하는 군사 행동에 나선다면 분명 어느 정도의 손실은 감수할 수밖에 없지만 앞으로 벌어질 대규모 전쟁에서 얻을 피해에 비하면 이 같은 위험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죠.
하지만 처칠의 이 같은 주장은 그 시기 영국 정부를 움직이던 볼드윈-맥도널드 정권에 의해서 철저하게 무시당하는데요. 이 같은 상황에서 처칠의 느꼈던 좌절과 절망, 고통은 그가 직접 쓴 다음 문장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처칠이 전쟁이 터지기 전에 겪었던 이 같은 시련과 고통이야말로 훗날 그가 전쟁 지휘부에 합류해 수상의 자리에 오르고,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국민들을 하나로 모아 나치 독일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이유가 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전쟁에 발발하기 전에 영국 정부의 핵심 요직에 있었던 인물들이라면 누구나 ‘히틀러가 야심에 가득 차서 전쟁을 준비하는 걸 미리 막지 못하고 그냥 지켜만 봤다’는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죠.
독일이 매년 10억 파운드나 되는 천문학적인 돈을 군사비로 쏟아부으면서 침략의 야욕을 키워갔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의 협상을 통해서 평화를 얻어낼 수 있다는 헛된 생각에 빠져서 결국 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참사를 불러일으킨 죄였죠.
전쟁 발발 이전의 시기에 영국 정부의 각료로 참여했던 인물들이라면 크든, 작든 이 같은 책임과 잘못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이 같은 원죄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물은 오직 한 명, 윈스턴 처칠뿐이었죠. 집권 여당인 보수당 안에서 입지가 그다지 강하지 못했던 처칠이 수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2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걸 방관하고만 있었다는 책임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정치적 지지 기반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리더십을 행사하고 또 국민들의 큰 지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끊임없이 경고했던 대로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고 이에 따라 영국이 나라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하자 그동안 그가 외쳐왔던 말들이 그의 탁월한 판단력과 선경지명을 증명하는 수단이 된 것이죠.
10여 년 동안 홀로 전쟁의 위험성에 경고해왔던 과거가 처칠의 리더십과 권위를 다른 정치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죠.
오늘은 처칠이 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 10여 년 동안 권력의 핵심에서 빗겨서 있으면서 여러 좌절과 고통을 겪었던 경험이 처칠이 전쟁을 이끄는 리더가 돼서 강력한 권위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는 내용에 대해 설명해봤습니다.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처칠의 <2차 세계대전>을 읽으면서 인생은 아무도 모르는 것, 인생지사 새옹지마(지금 당장은 좋아 보이는 일이 훗날 해를 끼칠 수 있고, 지금은 고통스러운 경험이 나중에는 큰 도움이 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의 사자성어)라는 말이 계속 떠올랐는데요.
비록 지금 힘든 상황에서 처해 계신 분들이라도 오늘 제가 말씀드린 처칠의 사례를 떠올리시면서 기운을 내시기 바라겠습니다. 지금 독자님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들이 나중에 가서는 오히려 독자님에게 큰 도움이 되는 값진 경험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처칠이 전쟁을 경고하는 자신의 연설이 공허한 메아리로만 머물던 시기에도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 전쟁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자신의 눈으로 직접 전선을 살펴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활용해 전쟁을 준비해야 된다고 주장했었는데요.
이처럼 힘든 상황에 처해있더라도 상황을 바꾸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 역시 마음속에 함께 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글은 여기서 이만 마치겠습니다. 독자분들 모두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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