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언론의 트럼프 때리기를 넘어 미국 보호무역주의 200년 역사를 보자
자유무역체제의 수호자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이후 급격하게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집권하자마자 전임 오바마 행정부의 주요 대외정책이던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와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를 선언한 데 이어 최근엔 자유무역체제의 근간인 WTO(세계무역기구)에서도 발을 뺄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11일 국내외 주요 언론에 따르면 지난 10일(현지시간) 열린 WTO 각료 회의에서 미국측 참석자들은 WTO 체제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트럼프 정부 집권 이후 처음 열린 각료 회의 자리다. 이날 회의에서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비롯한 미국측 참섬자들은 사실상 WTO 체제를 포기할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을 하는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지난달 베트남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WTO에서 우리(미국)를 공정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고 말했던 트럼프 대통령의 불편한 감정이 이번 회의에도 변함없이 이어졌단 분석이다.
미국의 이 같은 발언이 정녕 WTO 탈퇴까지 염두한 발언인지 아니면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뻥카'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미국이 반세기 넘게 이어져온 자유무역체제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에서 벗어나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최우선을 두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죽하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미국 대신 자유무역체제의 맏형 역할을 하겠다고 나설 정도일까.
트럼프 대통령은 CNN,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주류 언론과 당선 전부터 매우 불편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래선지 보호무역주의로 회귀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 트럼프 정권의 움직임에 대해선 거의 대부분의 미국 주류 언론도 비판적인 태도다. 기업과 정신과 자유무역시장을 바탕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경제를 일궈온 미국이 보호무역주의를 택하다니 그럴 만하다. 미국 주류 언론을 읽다 보면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무역주의로의 회귀에 대해 그 배경을 차분히 분석하기보단 그저 정신 나간 사람이 벌이는 멍청한 짓 정도로 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미국은 그 탄생부터 '위대한' 자유무역시장의 발전과 함께해온 나라일까? 어떠한 종류의 무역 장벽에도 기대지 않고 오로지 기업인의 창의성과 도전정신만을 바탕으로 성장해온 나라가 미국인 걸까?
최근 한국에서 출간된 <현실의 경제학>(원제 Concrete Economics)를 읽으면서 우리가 알고 있던 기업가 정신과 자유무역체제의 수호자 미국의 모습과는 정반대인 미국 경제성장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트럼프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보호무역주의로의 전환이 긴 역사적 흐름에서 봤을 땐 오히려 가장 미국적인 정책에 가까우며 우리가 알고 있던 자유무역체제의 선도자 미국의 모습이 도리어 이질적인 모습이었다는 사실도.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이 갖고 있는 사상적 배경을 살피는 데도 도움이 되는 책이다.
책의 저자들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무역체제의 수호자로서 미국의 모습은 허구다. 적어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렇다.
이 책에서 미국 보호무역주의와 제조업 육성, 공산품 수출 정책의 아버지로 꼽고 있는 인물은 알렉산더 해밀턴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 중 한 명인 그는 독립국가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을 맡았다. 그는 정적들의 반대를 무릅쓰며 천연자원 수출에만 의존하던 미국을 제조업 국가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과감한 정책을 추진한다. 남부에 있던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수확한 농산물과 각종 천연자원을 유럽 선진국에 수출하는데 의존하던 미국 경제를 북부 제조업 공장 지대에 생산한 공산품을 수출하는 '세계의 공장'으로 재편하는 첫걸음이었다.
저자들은 만약 해밀턴식 개혁이 없었다면 미국 경제는 천연자원 수출에만 의존하다 경제가 고꾸라진 아르헨티나나 기껏해야 '조금 더 큰 오스트레일리아' 수준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해밀턴 시기 미국의 기술력이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선진국들과 비교해 조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미국의 유일한 강점은 풍부한 천연자원뿐. 해밀턴을 필두로 한 미국 집정자들은 우선 국내 제조업을 육성하기 위해 해외에서 들여오는 수입 공산품으로부터 자국 시장을 '보호'하기로 결정한다. 수입품에 30% 이상의 고율 관세를 매겨 해외 업체들이 쉽사리 미국 시장을 넘볼 수 없게 만든다. 높은 관세로 얻은 재정 수입은 다시 자국 제조업을 육성하는 예산으로 투입된다.
이 같은 고율 관세 정책은 2차 세계대전 무렵까지 200년 가까이나 지속되니 미국을 키운 건 자유무역주의가 아니라 보호무역주의인 셈이다. 데이비드 리카도가 말했던 비교우위론에 따라 당시 미국의 강점이던 풍부하고 값싼 천연자원 수출에 집중하는 대신 정부 차원의 보호와 투자를 바탕으로 미국의 비교우위 자체를 뒤바꾼 결정이었다.
18~20세기 중반까지 미국 경제의 부흥을 이끈 수단은 보호무역주의만이 아니다. 책에선 역대 미국 정부가 경제 성장을 위해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사례를 계속해 다루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중앙은행 제도와 중앙은행의 독점적인 화폐 발행권도 해밀턴이 반대파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며 밀어붙인 정책이었다.
미국 정부는 드넓은 국토를 연결해 기업 활동의 기폭제로 삼겠다는 계획을 갖고 철도 산업에 국가 차원의 막대한 투자를 한다. 미국 정부가 철도 개설을 위해 민간 철도회사들에게 공짜로 넘겨준 땅의 면적만 영국의 영토와 맞먹는다고 한다. 기업가들을 파산의 책임으로부터 구해주는 유한책임회사(LLC) 제도의 도입도 미국 경제의 발전을 이끈 요인 중 하나였다.
<현실의 경제학>은 미국이 오늘날의 부를 누릴 수 있게 된 이유가 익히 알려진 '신화'처럼 정부가 경제 성장에 개입하지 않고 모든 걸 민간의 자율에 맡겨둔 덕분이 아니라는 걸 밝히는 데 집중한다. 정부가 앞장서서 기업이 투자할 수 있는 영역을 개척하고 새로운 성장 동력에 투자하는 기업에겐 각종 혜택을 준 덕분에 미국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게 주요한 요인이라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물론 새로운 영역에 과감히 뛰어든 기업의 역할도 결코 가볍게 여기지는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무역체제의 수호자로서 미국의 모습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과의 냉전이 불붙은 시기다. 자신을 따르는 자유세계 동맹국들의 성장을 지원하기 위해선 이전처럼 마냥 자국 제조업의 이익만을 내세울 순 없었다.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 시장을 동맹국들에게 개방해 그들의 경제 성장과 번영을 지원할 필요가 생겼다. 200년 가까이 제조업 육성에 주력한 결과 미국 제조업 경쟁력이 세계 최고 수준에 달해 자국 시장의 문을 걸어 담그는 것보다 해외 시장의 문을 열어젖히는 게 미국 경제에 더 큰 도움이 된다는 계산도 물론 깔려 있다.
하지만 보호무역주의를 그만뒀다고 해서 미국 정부가 자국 제조업을 육성하는 데 뒷짐만 지고 있었던 건 아니다. 어마어마한 예산이 투입되는 각종 군사 기술 개발 프로젝트를 통해 자국의 기초과학과 공학기술 발전을 이끌었던 게 이후 미국이 택한 방식이다. 우주선, 인공위성, 항공기 개발 등 천문학적 예산이 들어가는 군사 기술 개발 프로젝트에 민간 대기업과 대학을 참여시켜 관련 분야의 기술을 급격히 발전시킨 뒤 이렇게 개발된 기술을 민간 분야에서 활용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대학원에서 공학 강의를 들을 때 수도 없이 등장했던 기관이 한 군데 있다. 다르파라고 불리는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회국(DARPA·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이 그곳이다. 미국 국방부 소속 연구기관인 DARPA는 1958년 처음 문을 열었다. 애초 군사 기술과 우주 항공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이지만 이곳에서 개발한 기술은 군사·우주항공 분야를 뛰어넘어 미국 기업이 세계 시장을 주무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인터넷의 원조인 아르파넷(ARPA Net)이 가장 대표적이다.
인터넷, 슈퍼컴퓨터, 반도체, 트랜지스터, 보잉 707, 전자레인지 등 애초 군사 프로젝트로 개발되었다가 민간 영역에 적용돼 막대한 부를 창출한 사례를 이 책에선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미국 경제 성장이 정부의 개입 없이 민간 기업의 혁신으로만 달성된 게 아니란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현실의 경제학을 읽다 보면 최근 트럼프 정부가 보여주는 보호무역주의 강화 정책이 미국 역사에선 그리 낯선 모습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트럼프 정부는 왜 다시 반세기 이상을 거슬러 보호무역주의로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이는 걸까?
이에 대한 답 역시 이 책에서 어느 정도는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에선 트럼프라는 단어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한 권의 책만을 읽고 미국 무역정책의 패러다임이 변해가는 이유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다. 다만 현재 미국이 처한 상황을 보면 트럼프 정권이 보호무역주의로 돌아가려는 이유를 어느 정도는 유추해볼 수 있다.
저자들에 따르면 미국은 1980년대 이후 제조업 육성 정책을 포기하고 새로운 산업을 중심으로 자국 경제를 재편하기 시작한다. 세계의 공장 역할은 일본, 중국, 한국(저자들이 중요하다고 언급한 순)을 대표로 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에 맡기는 대신 미국 경제를 금융 서비스업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목표였다. 자국 금융 서비스를 발전시켜 세계 곳곳으로 진출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저자들에 따르면 제조업이 쇠퇴하기 시작한 이후 미국 경제가 거둔 GDP(국내총생산) 성장의 상당 부분은 미국 경제의 실질적 성장을 나타내기보단 그저 각종 금융 서비스의 중개 수수료가 올랐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각종 금융업체들이 활동 영역을 넓힌 결과 기업 인수합병 비용, 주택담보대출 수수료, 금융 서비스 상담료, 보험 처리비용 등이 급격히 상승했다. 이는 부가가치와 최종 생산물의 시장 가격을 더한 가격인 GDP가 상승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착시 현상을 불렀다. 하지만 그 같은 GDP 성장의 과실은 소수에게만 돌아갔다.
금융업이 주도한 GDP 성장의 열매는 소수가 독점하는 데 비해 제조업이 경쟁력을 잃는데 따른 고통은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제조업 노동자들이 짊어지게 됐다.
제조업 몰락으로 인해 미국 노동자들의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있다. 지난해 말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이코노미스트 저스틴 피어스와 피터 쇼트 예일대 교수가 작성한 보고서다. '무역 자유화와 죽음, 미국 지역의 증거'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중국 제조업과의 경쟁으로 타격을 입은 제조업체들이 주로 위치한 지역에서 백인 남성들의 자살률이 높아지고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과 공동 연구자 앤 케이스가 그 이전에 내놨던 또 다른 연구에서는 1999년부터 2013년 사이 미국 중년(45~54세) 백인 남성의 사망률이 증가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수십 년 동안 대부분의 인종과 연령대에서 사망률이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현상과는 정반대 되는 모습이다.
과거 제조업 기업에서 일하며 중산층의 삶을 누리던 중년 백인 남성들이 제조업이 쇠락하면서 일자리를 잃거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이에 따라 자살 등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고 해석하기에 충분하다. 중국 등 해외 국가들과의 무역 경쟁에서 밀리면서 미국 제조업 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흔히 러스트 벨트(Lust Belt)로 불리는 미국 내 제조업 쇠퇴 지역에서 높은 지지를 이끌어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We Make America Great Again)이란 구호를 외치며 제조업을 다시 부활시키겠다는 그의 선언에 실의에 빠져있던 제조업 노동자들이 호응한 덕분으로 해석된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보이는 보호무역주의 강화 움직임에는 지금껏 살펴본 역사적 맥락과 정치적 배경이 깔려있다. 다 아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책에서 읽은 내용까지 자세히 언급하며 꽤나 길게 글을 썼다. 한국 경제의 성장과 대다수 한국인의 삶의 질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미국 무역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의 배경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다. 미국 주류 언론과 이를 인용하는 한국 주류 언론에선 좋게 말해도 괴짜 혹은 나르시스트 정도로 취급받는 트럼프 대통령이지만 그가 단순히 쇼맨십만으로 세계 최강의 권력자인 미국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다이어트 콜라를 하루에 10잔씩 마신다던지, 트위터로 매일같이 정적들과 유치한 말싸움을 벌인다던지, 스테이크를 케첩에 찍어먹는 '초딩 식성'을 가졌다던지 하는 희화화된 뉴스는 중요하지 않다. 그의 정책에 깔린 역사적 맥락과 의도, 그의 핵심 지지층이 처한 경제적·사회적 상황을 살피고 앞으로 미국이 택할 정책들에 대해 예측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책임 있는 언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홍선표 한국경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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