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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선표 Dec 09. 2019

이순신도 두려워 망설인 적이 있었다

용기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게 아니라 공포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

“영웅과 겁쟁이는 둘 다 같은 감정을 느낀다. 사람들은 당신이 어떻게 느끼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하는 행동을 보고 당신을 판단한다.”


이 말은 전설적인 복싱 트레이너였던 커스 다마토가 남긴 말인데요. 그는 마이크 타이슨을 비롯해 호세 토레스, 플로이드 패터슨 같은 당대 최고의 복서들을 키워낸 인물로 유명합니다.


제가 그의 이 말을 접한 곳은 미국 실리콘밸리의 거물 투자자인 벤 호로위츠의 저서 <하드씽>에서였습니다. 


벤 호로위츠는 1999년 IT(정보통신기술)회사인 라우드클라우드를 창업한 뒤 전 세계 IT기업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던 2000년대 초반의 ‘닷컴 버블’ 와중에도 회사를 빠르게 성장시킨 기업인이었습니다. 이후 2007년에 회사를 HP(휴렛팩커드)에 매각한 뒤로는 벤처투자자로 활동하고 있죠.


커스 다마토가 마이크 타이슨에게 복싱을 가르치는 모습


그의 책 <하드씽>은 창업을 준비하거나 기업을 운영하는 이들이 꼭 읽어야 하는 명서로 꼽히는데요. 잘 나가던 회사들이 하루아침에 망해버리는 닷컴 버블 시기에도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과 회사를 운영하면서 그가 느꼈던 어려움들이 솔직하게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벤 호로위츠가 책에서 커스 다마토의 말을 인용한 건 ‘용기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게 아니라 공포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자세’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는데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공포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죠. 그리고 그건 벤 호로위츠 역시 마찬가지였는데요. 예를 들어 회사가 갖고 있는 돈으로는 단 3주밖에 버틸 수 없는 상황이라거나 회사 주가가 단 하루 만에 50%가 떨어진다면 누구나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는데요. 


<하드씽>을 읽다 보면 이런 상황들에서 벤 호로위츠가 느꼈던 절망과 공포가 그대로 전해지는데요. 하지만 그는 모든 일에 마무리된 뒤 쓴 책에서는 이처럼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고백하지만 위기에 처했을 그때 당시에는 자신의 두려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일 경우 모든 게 끝난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죠. 절망감에 압도된 모습을 보이는 대신 끄떡없는 모습을 보이면서 동료와 직원들을 이끌어나가죠.


밴 호로위츠가 표지 모델로 나온 <포춘>


용기란 공포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자세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글을 쓰면서 실리콘밸리의 창업자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건 요즘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용기란 공포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자세’라는 벤 호로위츠의 말이 계속해서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부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두 번째로 읽고 있습니다. 3년 전에 읽었던 난중일기도 완역본이라 꽤나 두꺼웠는데요. 이번 책은 그보다 훨씬 더 두껍습니다. 


난중일기에다 이순신 장군이 조정에 올려 보낸 장계(보고 문서)의 내용을 담은 임진장초와 그가 평소 지인들과 주고받은 서한집(편집 묶음), 그의 행적에 대해 정리한 이충무공행록까지 번역해서 실은 덕분에 그 분량이 12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입니다.


다시 <난중일기>를 집어 든 건 이순신이란 인물만의 사고방식을 배우고 싶어서였습니다. 이순신이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고, 어떻게 결정을 내리고, 행동했는지 그만의 원칙과 사고방식을 알고 싶었는데요. 


7년간의 전쟁 기간 내내 그의 머릿속엔 어떤 생각들이 오고 갔는지 그의 생각의 흐름을 읽고 싶었습니다.   


<난중일기> 완역본


이번에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3년 전 처음 읽었을 때는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한 가지 정서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두려움이란 감정입니다. 


사실 <난중일기>는 읽기에 그다지 재밌는 책은 아닙니다. 하루하루의 일상을 써 내려간 일기이기 때문에 그냥 한, 두 줄만 적고 끝내버린 날짜도 많고요. 


전투에 대한 자세하고 생생한 묘사는 찾기 힘듭니다. 당장 전투를 앞두고 있거나 전투를 치렀을 무렵에는 바빠서 일기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인데요. 큰 전투가 있었던 무렵엔 몇 달 가까이 기록이 빠져있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선 수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잠잠해졌을 무렵,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이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시점에 남긴 기록들이 더 많은데요.


그렇기 때문에 이순신이 군대를 훈련시키고, 다른 장수들과 의견을 나누고, 전쟁 물자를 마련하고, 조정에 올릴 보고서를 쓰고, 어머니와 가족에 대해서 걱정하는 내용들처럼 이순신의 평소 생활 모습이 난중일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 


이순신 장군 초상


첫 전투를 앞두고 느낀 두려움과 망설임


그리고 이렇게 전투에 나가 군사를 지휘하지 않았을 적에 이순신이 남긴 기록들을 보면서 그 역시 두려움이란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는데요. 사실 이순신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두려움, 공포, 절망, 체념 같은 단어들일 겁니다. 


모든 것을 잃은 뒤에도 단 ‘열두 척의 배’만을 갖고 승리를 만들어낸 난세영웅 이순신과 두려움이라는 단어는 정말 어울릴 수 없는 단어처럼만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역시 사람인 이상 두려움과 공포라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요. 이런 모습은 그가 첫 전투를 벌이기 직전의 일기를 보면 잘 드러납니다.  


1592년 4월 13일(음력 기준‧모든 날짜는 음력 기준) 일본군 함대가 부산 앞바다에 등장하면서 7년에 걸친 긴 전쟁이 시작되는데요.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칼로 두부를 베는 것처럼 거침없는 기세로 진격해 전쟁 20일 만인 5월 2일 한양을 점령합니다. 


상주와 충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조선군은 연달아 크게 패배하면서 일본군을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왕과 조정 대신들은 일본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한양을 떠나 북쪽으로 피난을 떠나는데요. 왕이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가버리자 분노한 백성들이 궁궐을 불태워버리는 일도 일어납니다.


(유튜브 채널 <홍선표의 고급지식>에 오시면 이순신을 비롯해 역사와 기업 경영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의 삶과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쉽고 재미있는 설명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순신이 조선의 첫 승리이자, 자신의 첫 전투인 옥포해전을 치른 건 5월 7일이었습니다. 경상도 거제현 옥포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 함선 50여 척과 싸워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웅포현 합포 앞바다에서 적의 소규모 함대를 격파했습니다. 전쟁의 흐름을 바꾼 조선 수군의 반격이 시작된 날이었습니다.


이순신이 함대를 이끌고 전라좌수영을 떠난 게 5월 4일 새벽이었으니 출진 사흘 만에 적을 만나 전투를 치른 거였습니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이 첫 출정에 나서기 하루 전, 그러니까 5월 3일에야 비로소 군대를 일으켜 적과 맞서 싸울 결심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난중일기>에 나와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얼마 뒤에 녹도 만호(정운)가 접견을 요청했다. 불러들여 물었더니 “우수사는 오지 않고, 적의 세력이 서울 근처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아프고 답답한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프고 답답할 뿐입니다. 기회를 놓친다면 나중에 아무리 후회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곧바로 중위장을 불러, 내일 새벽에 길을 떠날 것을 약속했다. 곧바로 ‘임금님께 보고하는 글’을 수정해 내보냈다.



지금 당장 출진하지 않으면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 내용을 보면 이순신의 부하 장수였던 녹도만호 정운이 찾아와 이순신에게 ‘지금 당장 출진하지 않으면 일본군을 무찌를 기회를 놓치게 된다’며 강하게 밀어붙인 덕분에 마침내 이순신이 전투를 결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순신이 전쟁이 터진 지 20여 일이 지나도록, 그리고 일본군이 서울을 향해 파죽지세의 기세로 진격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출정을 미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함께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로 약속했던 전라우수사 이억기 휘하의 수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공문을 보면 이억기의 군대는 4월 30일에 전라우수영 본영에서 출발하기로 돼있었는데요. 


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라우수군은 며칠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이 전라우수군이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역시 <난중일기>에 잘 나와 있는데요.    


이순신 장군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그림


5월 3일 일기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본도(전라도) 우수사(이억기)가 수군을 이끌고 오기로 함께 약속했었다. 그런데 방답(부하 장수 방답첨사 이순신, 이순신과 동명이인)의 판옥선이 첨입군(인근지역의 군사들)을 싣고 오는 것을 보고, 우수사가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기뻐했다. 


군관을 보내 확인해보니, 즉 방답의 배였구나. 놀라움을 이길 수 없었다. 


전라우수군이 도착하기만을 얼마나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던지 자기 부하 장수의 배를 보고 지원군으로 착각해 뛸 듯이 좋아했다는 내용이죠. 지원군이 아니란 걸 확인하고는 ‘놀라움을 이길 수 없었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크게 실망했고요.


이순신이 이억기의 전라우수군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데요.


그리고 이 일이 있고 몇 시간 안 돼 녹도만호 정운이 찾아와 이순신에게 출정을 건의합니다. ‘지금 출정하지 않으면 적을 막아낼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었죠.


첫 전투를 결심하는 과정을 담은 이 기록을 보면서 이순신 역시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적과의 싸움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이순신이 처음 출진하던 당시 전라좌수군에는 대형 함선인 판옥선이 24척, 중형 전선인 협선이 15척 있을 뿐이었습니다. 소형 쾌속선인 포작선도 46척가량 있었으나 이렇게 작은 배로는 적선과 맞붙어 싸울 수 없었죠. 사실상의 전력은 39척에 불과했는데요.    


이에 비해 일본군은 수백 척이 넘는 함대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연전연승을 거듭한 덕분에 병사들의 사기도 하늘을 찌를 듯 높은 적군이었습니다. 


이처럼 불리한 상황에서는 어떤 지휘관이더라도 전투를 망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순신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이런 상황에서 승산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선 전라우수군과 합류해 아군의 전력을 강화시켜야 했지만 전라우수군의 출진이 계획보다 늦어지면서 지원군이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이 돼버렸습니다. 


여기서 이순신은 계속 전라좌수영에 머물며 지원군을 기다린다는 선택을 내릴 수도 있었습니다. 



전라좌수군만으로 일본 수군에 맞서기로 결심하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일본 수군이 남해를 거쳐 서해로 진출해 전라, 충청, 경기 앞바다를 휘젓는 악몽이 현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일본 수군이 서해로 돌아나가 배에 실은 식량과 전투 물자를 육군에게 보급하게 된다면 육지의 일본군은 훨씬 더 강해지고, 더 많은 조선 백성들이 목숨을 잃게 되고, 전쟁에서 질 가능성도 더 높아졌죠.     


그리고 이순신은 지원군을 기다리는 대신 자신의 병력만으로 적의 선봉을 꺾어내겠다는 결단을 내리는데요. 


녹도만호 정운의 말처럼 일본 수군이 서해에 진출하는 것을 막아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면 나중에 아무리 다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하더라도 이미 기울어버린 전쟁의 승패를 바꾸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연달아 승전을 거두며 사기가 높은 데다 수적으로도 우세한 적군과 맞서 싸우는 건 승산이 적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불리한 상황에 처해있긴 하지만 지금 이 기회를 놓친다면, 지금 적군의 기세를 꺾지 못한다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고 자기 휘하의 병력만으로 출진합니다. 


저는 이 부분의 <난중일기>를 읽으며 이순신의 결단뿐 아니라 망설이고 있는 상관에게 찾아가 결단을 내릴 것을 간언한 녹도만호 정운의 기백 또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녹도 만호 정운의 초상


정운은 이순신 함대에서 돌격장 역할을 맡아 총탄이 퍼붓는 전선 한가운데로 가장 먼저 뛰어들던 용맹한 장수였습니다. 훗날 그가 전투 중에 숨지자 이순신이 직접 제문을 지어 그의 제사를 지내고, 조정에 그를 기리는 사당을 세워줄 것을 요청했을 정도로 이순신이 믿고 아꼈던 장수였는데요. 


사실 정운은 이순신보다 6년 먼저 무과에 급제한 인물이었습니다. 이순신과 정운은 둘 다 임진왜란 1,2년 전에 각각 전라좌수사와 그 휘하의 녹도 만호로 임명되는데요. 


일본이 조선을 침범할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우려한 조정에서 남해안 일대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유능한 장수들을 지휘관으로 보낸 거였습니다. 


직속 장관을 찾아가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군사를 일으킬 것을 요구했던 정운, 그리고 부하의 말을 듣고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자마자 곧바로 출진을 명령한 이순신. 


정운과 이순신 둘 사이에 맺어져 있던 서로에 대한 강한 신뢰 역시 이순신이 두려움을 버리고 전투 개시를 결정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습니다.  



맑았다. 먼동이 틀 때에 배를 출발했다. 곧바로 미조항 앞바다에 도착해 다시 약속했다. 우척후(김완)와 우부장(김득광), 중부장(어염담)과 후부장(정운) 등은 오른쪽에서 개이도로 들어가서 수색‧토벌하게 했다. 


그 외의 나머지 대장선은 함께 평산과 곡포, 상주포, 미조항을 지났다.


두려움과 망설임을 떨쳐낸 이순신이 첫 출정에 나선 1592년 5월 4일의 일기입니다. 조선의 첫 승리와 마지막 승리를 일궈낸 이순신의 전승(全勝‧모든 전투에서 승리함) 신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죠.


이번 글에선 첫 전투에 나서기 직전의 이순신의 모습을 통해 이순신과 같은 인물일지라도 강한 적 앞에서는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을 살펴봤는데요. 


이순신을 이순신으로 만든 가장 큰 원칙은 자신이 느꼈던 두려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위로는 국왕, 아래로는 부하 장수와 병사, 백성들 앞에서는 항상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인다는 거였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느끼느냐가 아니라 내가 하는 행동을 보고 나를 판단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우리가 모르고 있던 이순신의 모습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가고 있는데요. 예를 들어 많은 분들이 이순신이 적의 총탄에 맞은 건 조선 수군의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대첩에서의 한 번 뿐이라고 알고 계시는데요. 사실 이순신은 이미 전쟁 초기에 적의 총탄에 맞아 총알이 등을 뚫고 나가는 부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난중일기>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과 느낀 감정들에 대해서는 이번 글처럼 하나씩 하나씩 정리해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홍선표 한국경제신문 기자

rickeyg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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