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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록키 Sep 07. 2018

012. 세상 참 좋아졌네

손님: 일본인 여자 2명


말 안 하셔도 돼요. 한 바퀴 편하게 돌아주세요.


난감해하는 나에게, 여행 가이드가 말했다. 일본어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나에게, 가이드는 일본인 손님 두 명을 맡겨놓고 자리를 떠났다. 그때부터 언어가 다른 사람들과 불편한 여행이 시작됐다.
"Can you speak English?" 
일본 손님은 내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영어로 몇 마디 더 던져봤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묵언 여행뿐이었다. 일본인 손님들은 인력거 위에서 충분히 즐기는 것 같았지만, 침묵이 길어져서 내가 조금 불편했다. 불편한 여행이 길어지는 그때, 유레카처럼 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님과 함께(TV 프로그램)’에서 나온 장면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nFkha61X2A


사유리의 아버지(일본인)가 이상민과 전자사전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었다. 스마트폰에도 비슷한 애플리케이션이 있다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파파고(네이버 번역)를 다운로드하고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했다. 그제야 조금씩 일본인 손님들과 대화가 시작됐다.


파파고에 '최근에'를 입력하자, '최근에 직장을 잃었어.'라고 스마트한 변역도 해준다.
'띵작('명작'의 은어)'을 'r'nasterpiece라 변역하는 섬세함까지


왕의 아들이 살던 궁전. 물 근처에 사는 나무. 물이 흘렀던 곳. 궁궐 뒤에 있는 산.

짤막한 단어와 문장을 말하자, 스마트폰이 꽤나 정확하게 번역해주었다. 전자 여성이 청아한 목소리로 일본어를 읊어주자, 일본 손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때로는 스마트폰이 내 말을 못 알아듣기도 했고, 전혀 엉뚱한 문장을 일본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외국인과 기초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조용했던 투어도 대화가 통하자 화기애애한 투어로 바뀌었다. 어느 순간부터 일본 손님도 번역 어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언덕이 많습니다.”
일본 손님의 스마트폰에서 전자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력거가 높은 언덕을 오를 때였다. 그러자 나도 손님을 안심시키려, 스마트폰에 이렇게 말했다. 
"저는 힘이 아주 셉니다." 
그러자 손님들은 전자 여성의 목소릴 듣고 “스고이!”를 외쳤다. 
일본 손님들은 칭찬이 후했다. 대게 하는 말이 나를 칭찬하는 문장이었다. 
'대단하다. 똑똑하다. 박식하다. 친절하다. 등등.'
일 년 동안 받을 칭찬은 다 받은 것 같았다. 사실 내가 잘했기 보단 번역 애플리케이션이 다 한 건데, 과한 칭찬을 받았다. 
기술발전의 혜택을 직접 받고 나니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실감 났다. 고등학생 때, 자매결연한 학교 일본인들이 한국에 놀러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땐 말이 통하지 못해 답답했었다. 일본 친구들이 LAST YEAR(작년)도 못 알아들었으니, 도저히 대화를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젠 내가 일본어를 할 줄 몰라도 대화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어느 외국인이 오더라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다.
즐거웠다.”
마지막으로 손님의 스마트폰에서 나온 말이었다. 내 귀에 즐.거.웠.다 네 글자가 들리는데, 사뭇 감격적이었다. 한 시간 동안 일본 손님을 즐겁게 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즐거웠습니다.’라고 존댓말로 번역해줬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감격은 배가 됐을 것이다. ‘언젠간 기술이 발전해서 상황, 문화, 문맥까지 고려해 번역하는 똑똑한 기술이 생기지 않을까.’라며 뜬금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생각해보니, 그 시기가 그리 멀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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