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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키 Aug 30. 2024

시작의 턱

“난 시작하는 건 쉬워. 그냥 하고 싶은 건 다 해보는 거지 뭐.”


헬스, 필라테스, 보컬, 드럼, 영어 과외, 독서 모임 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 내게 주변인들은 묻곤 한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냐고. 그럴 때마다 난 그냥 관심이 생긴 건 해봐야 한다고, 오래 하진 못할지언정 시작은 쉬운 사람이라고 답하곤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시작이 쉬웠던 건 아니다. 8년째 계속해오고 있는 춤에 있어서도, 그 시작까진 꽤나 지지부진했다.


춤을 배워 보고 싶다고 생각한 건 군대 후임이자, 전역 후에도 종종 만나던 형 M과의 만남에서부터였다. M은 대화 중 뜬금없이 춤을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나도 춤 배우고 싶어,라고 이야기했으나 그때 그 답은 실천 의지가 없는 장단 맞추기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변의 댄스 학원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당장 상담받으러 가보자고 했다. 장단을 맞출 뿐이었던 나는 오늘은 너무 갑작스럽다며 회피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이 흘렀으나, 춤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왜 예전부터 춤을 좋아했으면서 배워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왜 M처럼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지? 그러나 나는 또 시작을 미루고 말았다. 여기저기 학원은 찾아봤지만 내가 가서 잘할 수 있을까, 남자는 나밖에 없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들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년 정도 흘렀을까. 대학 졸업 후 생각보다 길어지는 취업 준비생 시기에 자신감은 줄어들고, 몸무게는 나날이 늘어가던 순간 운명처럼 그 문구를 마주하게 되었다.

‘지금 네이버에서 OOO 댄스학원을 검색하세요.‘


빨간 신호에 잠시 멈춘 버스 창밖으로 댄스 학원의 작은 간판이 보였고, 그 간판의 문구가 뇌리에 박혔다. 신호는 초록불이 되었고 버스는 출발했으며, 내 핸드폰에는 초록창 검색 결과가 나와 있었다. “그냥 해보자. 후회하더라도 해보고 후회하자.”


그렇게 등록한 댄스 학원에는 역시나 어린 학생들이 많았으나 다행히 내가 등록한 반은 취미 반이어서 내 또래의 사람들도 많았다. 다만, 남자는 역시나 나 혼자였다. 수업 시작 전까지 너무 뻘쭘해서 어디 구석에라도 숨고 싶었으나 춤을 추기 시작하니 내 나이, 내 성별은 딱히 신경 쓰이지 않았다. 춤을 추는 그 자체가 즐거웠고, 사실 춤을 배우는 동안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선생님이 알려주는 동작을 보고, 따라 하고, 익히는데 온 집중을 다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재밌는 걸 왜 진작에 시작하지 않았을까.


내가 속한 취미반에는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를 두신 것 같은 40대 중반의 어머님도 계셨다. 화려한 스타일의 옷에 춤에도 열정적이신 분이어서 항상 멋있다고 생각하던 분이었다. 어느 날은 잠깐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실 어리고 젊은 친구들이 오는 곳인데 내가 와도 되나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 턱을 넘지 못하면 아무것도 못 하겠더라구요.”


그랬다. 그 시작의 턱을 넘는 것. 그건 시작하기 전에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턱을 한 번 넘고 나니 매일 넘어 다니는 방 문 턱만큼 낮은 것이었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구나 생각했다.


첫 시작의 턱을 넘고 나니 두 번째 턱을 넘는 것은 쉬웠다. 취업 후 서울에 터를 잡은 뒤 새롭게 춤을 배울 곳을 찾아보았다. 이제는 방송 댄스에서 벗어나 새로운 스타일을 배워보고 싶었고, 평소 인스타그램으로 팔로우하던 댄서의 클래스를 신청했다. 방송에도 나오는 유명한 댄서의 춤을 잘 따라갈 수 있을까, 또 턱을 만났지만 그 턱을 넘는 것은 이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 클래스에서도 남자 수강생은 나뿐이었고, 클래스를 수강 중인 다른 어린 친구들은 춤을 무시무시하게 잘 추었지만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나중에 알고 보니 그 클래스에 직장인 수강생도 내가 최초였다.)


여전히 끈질기게 하는 것은 춤뿐이지만 그래도 이젠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때 길게 고민하지 않는다. 시작해 보기 전까진 결과가 어떨지 알 수 없는 거니까.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고민하는 것보다, 시작해 보고 후회하는 게 더 낫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시작의 턱도 넘어본 사람이 넘는다. 시작의 턱을 넘고 넘고 넘다 보면 세상에 못 할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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