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생경한 낯선 역에서 내린다. 1번 출구로 나와 역 근처의 자그마한 이디야로 들어간다. 작디작은 공간, 홀은 다닥다닥 붙은 테이블로도 가득 차 옆 테이블의 대화도 훤히 다 들릴 판인데 웬걸 주문용 키오스크가 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주문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손놀림이 느리다. 아가들아 서둘러 주렴. 지금 아저씨는 빨리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이 패딩을 벗어 버리고 싶단다. 생긴 지 1년도 되지 않은 마이너한 노선을 보통의 퇴근 시간보다 이른 시간에 타는 사람은 없겠지, 방심한 탓에 롱패딩을 입고 만원 지하철에 낑겨 있던 터라 몸에는 땀이 그득하다. 주문을 마치고, 패딩을 벗고, 빠르게 나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켜고 진정을 찾은 뒤 독서를 시작해 볼까 하던 참에 앞서 주문하던 아가들의 대화가 들린다.
“…볼… …러브… …쌤…”
어젯밤 잠들기 전, 나무위키를 들여다보며 공부했던 단어들인 것 같은데. 그리고 한때는 나의 소유였던,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단어들도 들린다.
“기말고사.. 내신… 급식…”
머리가 아찔했다. 오늘 나는 처음으로 보깅을 배우러 왔고, 내 짐작이 맞다면 저 아가들은 나와 같은 수업을 들을 것이다.
9월 말 직장인 댄스 공연을 보러 갔다. 각 장르별 선생님과 직장인들을 매칭해 팀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공연이었다. 멋있는 공연들이 많았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새파란 미니스커트와 힐 부츠로 무장한 보깅 공연이었다. 보깅을 처음 봐서 낯설어하고 있었는데 공연 중간 선생님이 등장하는 순간 내 마음은 뒤집어졌다. 기본 동작임에도 미친 듯이 파워풀만 그 모습에 보깅을 배운다면 저분에게 배워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인스타그램을 염탐하고 있었다. 10월 베이직 수업은 수요일, 아 원래 듣던 수업이 있는 날이라 안 되네. 11월 수업은 토요일, 아 올카인드 연습 날이라 탈락. 그렇게 12월, 수업은 매주 목요일 진행 예정. 필라테스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문의 DM을 남겼다.
- 안녕하세요. 12월 보깅 수업 신청해보고 싶어서 DM 드립니다. 30대 남자고 보깅은 처음인데 참여 가능할까요?
- 안녕하세요! 신청 가능하세요 ><
“나 OO쌤 보깅 수업 듣기로 했어! 너도 요즘 보깅 수업 듣는 것 같던데?”
“아 진짜요? 전 요즘 너무 보그 팸만 한 것 같아서 올드 웨이 배우고 있어요.”
보그 팸?? 올드 웨이?? 보깅은 다 같은 보깅 아닌가. 보깅에도 복잡한 갈래가 있다는 친구의 말에 수업 전 날 밤 잠들기 전 나무위키를 뒤적뒤적해보았다.
보깅은 대략적으로 1970년대쯤 뉴욕 할렘의 볼룸(Ballroom)신에 속한 LGBT 성소수자들에 의하여 최초로 시작된 춤으로, 보그 잡지 모델들의 부자연스러운 포즈들을 묘사하는 것에 기초하여 시작되었다고 한다. 주로 초기 형태의 보깅을 올드 웨이(Old way)라 부르고, 발레 및 기계 체조를 하던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생긴 스타일의 뉴 웨이(New way), 트랜스젠더들이 보깅을 여성스럽게 하고자 하면서 생긴 보그 팸(Vogue Femme)으로 나뉜다. 내가 신청한 수업은 보그 팸 베이직이었으며, 실제 볼 행사에서 가장 살벌한 기싸움이 펼쳐지는 카테고리다. 보깅은 MC 역할을 하는 호스트가 음악에 맞춰 챈트를 하는 것이 특징인데, 흥을 돋우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성소수자들에 의해 생긴 장르여서 그런지 생물학적 성별보다는 본인의 성적 지향성을 기준으로 하는 듯하다.
간단한 지식을 공부하고 당당하게 연습실에 왔으나 함께 듣는 아가들의 나이에 기가 죽어버렸다. 옷을 갈아입고 나와 홀 기둥 뒤에 쭈그려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내향인에겐 낯선 장소와 낯선 사람들만으로 벅찬데, 대학생도 아닌 고등학생들이라니..! 얘들아, 아저씨 집에 갈까?
“자 A 홀로 들어가시면 돼요.”
선생님이 등장한 순간, 한눈에 느꼈다. 아, 쎄다. 표정과 몸짓, 애티튜드, 아우라 그 무엇 하나 친절한 구석이 없었다. 이것도 다 따지고 보면 서비스의 영역이기 때문에 보통 친절하고자 노력하는데, 장르의 특성 때문인지 학생들이 많아서인지 DM에서의 그 웃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첫 시간이니까 간단하게 자기소개할까요. 이름, 나이, 하는 일. 전공생은 뭐 전공인지 말해주면 돼요.”
“OOO, 17살, 배우 지망생입니다.” “, 18살, 학생입니다.” “, 21살, 실용무용과 전공입니다.”
싸늘하다. 내 차례가 다가온다. 잘 봐 얘들아, 아저씨는 말이지 “리키, 3N살, 회사 다닙니다.”
그렇게 나 홀로 30대인 곳에서, 나 홀로 보깅이 처음인 곳에서의 첫 수업이 시작된다. 선생님은 두 팔을 양쪽으로 쭉 뻗는다. 그러면 아이들이 따라 하고, 나도 눈치껏 따라 양팔을 펼친다. 선생님은 돌아다니며 각자의 자세를 교정해 준다. 도도한 터치에 나는 가슴을 더 펴고, 팔을 뒤로 더 젖힌다. 간단한 동작인데도 지지하는 다리는 점점 굳고 팔은 저려오기 시작한다. 팔을 더 들고 있을 수 없을 때쯤 한 챕터 종료.
본격적으로 팔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양팔을 가슴 앞에서 크로스 해 어깨를 살짝 터치. 그 후 두 팔꿈치를 내 명치 앞에서 서로 마주하게 하고, 양 손목이 서로 맞닿은 채로 손은 뒤로 꺾는다. 뱃살과 팔뚝살이 그득그득한 나에겐 너무나 가혹한 동작이다.
“몸 안쪽에 힘을 주고 안에 잡아 두는 연습을 해야 돼요. 벌리는 건 쉬운데 잡아 두는 건 어려워요. 다시 시작.”
물 한 잔 마시고 다음 동작 시작. 무릎을 굽힌다. 골반은 뒤로 빼고 가슴은 위로 치켜든다. 이 자세로는 그냥 걷는 것도 힘들 것 같은데, 그냥 걸으면 보깅이 아니지. 양쪽 허벅지를 떨어뜨리지 않은 채 스치듯 지나 왼발을 앞, 아니 오른쪽 대각선에 놓는다. 왼발이 바닥에 닿을 때 뒤에 있는 오른발도 왼쪽으로 꺾는다. 이게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걸음인가요? 제 발목은 무사한 것일까요? 허벅지는 터질 것 같고, 허리는 아프고, 종아리에는 알이 올라오는 힘든 걸음. 걷는 것도 안 되는데 팔 동작까지 섞으니 몸은 말을 듣지 않고, 땀만 줄줄 흐른다. 그래도 선생님의 콧소리 섞인 챈트를 들으니 흥이 나는 것 같기도. Huh!
수업의 마무리로 배운 루틴 영상을 찍은 후 옷을 갈아입고 나와 선생님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히 계세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네, 조심히 가세요.”
아 분명 말은 친절한 말인데, 표정과 말투는 전혀 친절하지 않다. 무섭다. 나 다음 주에도 수업에 올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마지막에 찍은 영상을 확인하며 좌절하고 있는데, 순간 인스타그램 DM 채팅방의 알람이 울린다.
-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오늘의 내용은 Hands Performance와 Cat Walk 두 가지를 배워봤어요.
핸즈는 손모양이나 피사체를 예쁘게 만들어보려고 해 보시고 자신만의 스토리라인을 형성해 보세요.
캣워크는 베이직을 중요시하게 여기되 자신만의 캣워크 스타일을 만들어 보시고 자신감을 제일 잘 보여줄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