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피로는 가시지 않은 것 같다. 나흘을 연달아 (과하게) 달린 탓에 어제 하루 종일 술병에 시달렸다. 마지막 연습도 동선 위주로 쉬엄쉬엄 참여하고, 허기진 속만 달랜 뒤 내리 10시간을 자고 일어난 참이었다. 나흘의 원죄를 단 10시간 만에 갚을 순 없었다. 첫 공연을 앞두고도 술 때문에 최종 연습에 불성실하게 참여하다니 이 정도면 알코올 중독자인가 싶다. 그래도 지나치게 떨리거나 걱정되는 마음은 없었다. 그냥 잘하겠지. 앞에 카메라 한 대만 있어도 긴장해서 안무 실수를 하는 주제에 공연을 앞두고 별다른 느낌도 없다니 참 요상한 자아다. 아니 또 생각해 보면 어릴 때도 큰 사건 앞에서 오히려 근거 없는 자신감을 뽐냈던 것 같기도 하다.
평소와 같이 외출 준비를 하고 의상을 챙겼다. 바지는 입고 가면 되고, 상의는 가서 공연 전에 갈아입어야지. 하얗게 빛나는 나이키 에어 포스는 무대 위에서도 빛나야 하니 가방 속에 고이 모셔 넣는다. (쌤 가라사대 무대에선 신발이 아주 눈에 띈다고 했다.) 공연장인 호서예술전문학교까지의 루트를 확인하고 집을 나섰다. 11시까지 모이기로 했으니까 조금 빠듯하겠는데. 종종걸음으로 걸으니 제법 추운 날씨에도 롱패딩 안으로 땀이 송골송골 솟아났다. 1호선을 타고 노량진역에서 내려 9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승강장에 서 있는데 내가 아는, 내 가방 속에 챙겨 둔 옷을 입은 남자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C야“
“오 형, 여기서 만나네요. 저희 11시까지 안 늦겠죠?”
“응. 여기서 급행 타고 가양에서 일반으로 갈아타면 안 늦어.”
우리 크루에 들어오자마자 공연을 준비하게 된 이 아이의 얼굴엔 설렘이 가득해 보였다. 그간 다른 멤버들의 하드 트레이닝에 지쳤을 법도 한데, 묵묵히 참고 따라오는 게 기특했다.
- 저희 앞에. 빼박 공연.
- 아 듣고 보니 그렇네.
- 저희보다 통 큰 바지네여.
일요일 오전에, 양천향교역까지, 저런 옷차림으로 올 사람은 오늘 우리와 같은 무대에 서는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의 뒤를 따라 도착한 호서예술전문학교는 학교라기보다는 그냥 건물 한 채였다. 약간의 실망감을 안은 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린 6층 공연장은 예상외로 본격적이었다.
“올카인드요. 게스트쇼 참가예요.”
“네 저쪽 안내에 따라서 게스트쇼 대기실로 먼저 이동하시면 됩니다.”
무대 뒤편의 비밀 통로를 따라 한 층 내려가 대기실에 도착하니 조금씩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다. 퍼포먼스 참가자들과 별도의 게스트쇼 대기실로 들어서자 내가 진짜 춤 좀 추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오 공연장의 이면은 이런 곳이구나.
“올카인드 멤버분들이랑 프로모션 비디오 같은 것도 찍어보면 재밌을 것 같아요.”
“저희 안 그래도 오늘 그 말하려고 했어요!”
시작은 계획 없는 바람이었다. 올드 힙합을 주장르로 하는 오리쌤의 안무로 프로모션 비디오를 찍어보면 좋지 않을까, 누군가의 의견에 모두가 슬금슬금 동의를 하던 차였다. 선생님과의 식사 자리에서 한 번 이야기를 꺼내 보자, 다만 선생님도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하는 일이니 어려울 수도 있다, 큰 기대는 하지 말자, 그러던 차에 선생님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다니. 금상첨화였다.
“제가 여름까지는 바쁘고, 가을쯤 시작하면 가능할 것 같아요.”
계획 없는 바람이 그러하듯 우리의 바람은 허공을 떠다녔고,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어서야 실질적인 논의에 들어갔다. 12월부터 준비를 시작해서 1월 말에는 촬영을 진행하자. 그리고 그 시점에 댄스 퍼포먼스 대회의 참가 제안도 들어왔다. 허나 우리가 준비 중인 오리쌤과의 퍼포먼스는 대회의 참가 자격(참가 인원 최대 5명, 참가자 창작 안무)에 어긋나 있었고, 결국 참가자가 아닌 게스트쇼 퍼포머로 참여하게 되었다. 대회 일자는 1월 5일, 우리는 애초 예상보다 서둘러 공연 준비에 들어섰다.
“올카인드 리허설 진행하겠습니다.”
처음 올라본 무대는 신기했다. 무대 앞에 설치된 카메라와 스피커들이, 바닥에 하얀색 테이프로 표시된 가로세로 위치 선들이 가슴 떨리게 만들었다. 항상 센터 잡는 게 문제였는데 선 중심으로 맞추면 어렵지 않겠는데.
“다 보여주지 말고, 동선 체크 위주로 살살 맞춰보자. S는 다리 조심하고.”
양쪽 사이드의 스피커와 무대에 표시된 선들을 좌표 삼아 동선을 체크한 뒤 리허설을 마쳤다. 대기실로 향하는 계단에서 다리를 절뚝이는 S가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어제 연습을 마치고 영상을 보며 길을 걷다가 다리를 접질린 터였다.
“S야, 다리는 괜찮았어?”
“응, 최대한 무리가 안 가게 무게 중심을 바꾸고 있어.”
“그래. 무대 올라가면 또 괜찮을 거야. 댄서는 무대에선 다 괜찮지.”
“근데, 우린 댄서가 아니라 직장인이잖아!”
“리허설 영상 모니터링하자.”
리허설 영상을 보며 세세한 동작과 동선들을 조정했다. 확실히 무대 위의 테이프 선들이 동선을 조정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센터 잘 잡아야 돼’, ‘옆 사람이랑 일직선 되게 잘 맞추자’ 식의 말보다 ‘센터는 세로 4번 표시된 선으로 잡아야 돼’, ‘두 줄로 설 때 앞 줄은 첫 번째 가로선, 뒷 줄은 두 번째 가로선에 맞춰 서자’의 말이 훨씬 더 명확했다. 영상은 후반부로 향하고 내가 가장 집중해서 봐야 할 부분이 나왔다. 내가 센터에 서는 10초 남짓의 시간. 그리고 H가 말했다.
“아, 이 부분은 그냥 잘해.”
“리키, 센터 부분에서 더 힘줘서 출 수 있어? 임팩트가 있어야 되는 부분인데, 너무 흘러가듯이 추는 것 같아.”
댄스 동아리 출신인 H의 디렉팅으로 진행된 평일 연습 하드 트레이닝. 하드 트레이닝의 대상은 나와 C였다. 물론, 주 트레이닝의 대상은 춤을 춘지 얼마 되지 않은 C였고 나는 옆에서 함께 연습하며 보조를 맞춰주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쯤 들려온 H의 따끔한 지적. 난 힘줘서 빡빡 추고 있었는데, 내가 언제 흘러가듯 췄지. 처음엔 작은 반발심이 들었다. 그래도 공연을 처음 준비하는 나보다, 여러 번 공연을 서 본 H의 눈이 더 맞겠지, 머릿속의 내 모습과 거울 속의 내 모습은 항상 간극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해야 더 힘을 줄 수 있을지 막막했다. 팝핑은 배워본 적도 없으니, 임팩트 있게 끊어내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그렇게 고민만 많던 이틀이 지나고 정규 연습 시간 오리쌤의 말 한마디가 힌트가 되었다.
“내려가고 올라올 때 숨 참고, 멈출 때 코어에 힘주고, 긴장 풀면 안 됩니다. 이 파트 한 번 해볼게요.”
그렇게 심호흡을 한 뒤 숨을 참고 올라갔다. 코어에 힘을 주며 멈추고, 긴장 풀지 않고 끝까지 동일하게. 10초가 흐른 뒤 H의 감탄이 들렸다.
“리키 뭐야!? 언제 이렇게 연습했어!?”
얼떨떨했다. H, 미안. 따로 연습은 하지 않았어. 그냥 쌤이 하라는 대로 했더니 괜찮았나 보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할게.
“8번째 무대 끝나면 다시 대기실로 모이자.”
전체 공연이 시작되었고, 각자 의사에 따라 대기실에서 더 연습을 하거나 공연을 보러 공연장으로 올라갔다. 난 공연장에서 다른 무대들을 관람하기로 선택했다. 공연 자체를 즐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다른 팀들은 어느 정도 수준인지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에겐 춤을 추는 직장인 친구들이 없었기 때문에 비교군 또한 없었다. 다들 우리 정도면 잘하는 거라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나를 포함한 신규 멤버들의 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멘트인 것 같았다. 그런데 무대를 보니 점점 자신감이 생겼다. 우리도 여기서 꿇리지 않을 것 같은데? 올드 힙합은 우리밖에 없어서 확 튈 것 같은데? 빨리 무대에 올라가고 싶어졌다.
“올카인드 무대 준비하실게요.”
무대 직전의 대기 공간에서 멤버들은 모두 상기되어 있었다. 각자 긴장감에, 설렘에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었다.
“아까 그 팀처럼 틀리면 어떡하지.”
“틀려도 괜찮아. 그냥 즐기자!”
“틀리면 안 돼! 틀리지 말고 즐겨!”
“올카인드 무대 올라가실게요! 파이팅!”
진행 스태프의 말에 우리는 무대 위로 올랐다. 무대는 암전이었고,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