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그런 날이 있다. 컨디션도 나쁘지 않고, 어딜 다친 것도 아닌데 춤이 잘 안 되는 날. 지난주의 나와 지금의 나는 동일한 상태인데 도무지 흥이 나질 않는 그런 날. 흥이 나지 않는 느낌은 프로도 동일한가 보다. <서울 체크인> 0화, MAMA 무대를 마치고 엄정화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던 이효리는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흥이 나질 않아 걱정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그녀는 무대에 오르는 순간 그 흥을 찾았고 성공적으로 무대를 마쳤지만, 영상 촬영이 예정되어 있는 나는 도통 흥을 찾을 수 없었다.
“남자들 저랑 같이 한 번 찍어볼까요?”
춤도 잘되지 않는 이런 날 선생님과 영상까지 찍어야 하다니. 어디까지나 영상은 선생님이 메인이고, 뒤에서 튀지 않게 동작을 잘 맞춰 추는 것이 나의 역할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성에 차지 않는다. 점점 흥이 오르고 있는 것 같은데. 몇 번만 더 해보면, 아니 차라리 혼자 추면 맘대로 출 수 있을 것 같은데.
“혼자 해보실 분?”
“저요!“
나와 함께 선생님 뒤에서 춤을 췄던 K가 손을 든다. K는 항상 자신감이 넘친다. 나보다 키도 크고 더 유연하지만 춤은 나랑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은데, 혼자 해 볼 사람을 찾으면 꼭 저렇게 손을 들더라. 질투심인지 부러움인지 모를 감정이 솟아오른다. K의 춤을 보며 나도 혼자 하고 싶다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자신감과 함께 숨어 있던 흥도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또 혼자 해보실 분?”
“……“
몸을 고쳐 앉는다. 평소라면 선생님의 눈을 피했을 테지만 조심스레 눈을 마주쳐본다. 마스크도 고쳐 쓰고, 춤과 상관없는 목도 가다듬는다. 나를 시켜 달라는 신호. 시켜만 주시면 못 이기는 척 한 판 풀어 보리라.
“더 없어요? 그럼 마지막으로 다 같이 한 번 해보고 끝낼까요.“
다 같이 춘 마지막에서 나는 흥을 되찾았고, 내 춤이 참 마음에 들었으나 그 춤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아쉬운 마음에 연습실을 쉬이 나가지 못하며 질척 질척 연습화를 벗었다. 왜! 꼭 이렇게 후회할 거면서 먼저 해보겠다고 말을 못 할까. 왜 시켜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 Y는 내게 오은영 박사의 말을 인용해 주었다. ‘왜 그럴까?’ 하는 일들의 원인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있다고. 생각해 보면 난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할 줄 아는 아이가 아니었다. 태생적으로 소심한 성격이 반, 넉넉지 않은 가정환경이 반쯤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말했을 때 거절당하는 것이 싫었던 것 같다. 상처받기 싫어 상처받을 일을 애초에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 맞겠지.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그것들을 대부분 얻을 수 있었다. 학생회장 선거 시즌이 되면 회장이 되고자 하는 친구들이 러닝메이트가 되어 달라며 찾아왔고, 동아리 회장은 내가 나서지 않아도 친구들의 추천으로 쉬이 될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원하고 있었지만 내가 스스로 그것을 말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내 손에 쥐여주었다. 그 결과,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원하는 걸 말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 버렸다.
내가 <금쪽 상담소>의 게스트라면 오은영 박사는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줄까? 너무 자명하다. 원하는 것을 직접 말하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겠지.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스스로 원하는 것을 말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마침 다음 달은 매주 새로운 안무를 짧고 굵게 배우고 영상을 촬영한다고 한다. 이번이 그 기회다. 이번엔 꼭 말해야지.
“제가 혼자 한 번 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