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자마자 뜨거운 습기가 몸을 감쌌다. 눈이 부셔 가방에서 허겁지겁 선글라스를 찾아 안경과 바꿔 썼다. 어제 양산을 샀어야 했는데. 너무 화려하거나 너무 칙칙한 것들 사이에서 적정한 것을 찾지 못했던 어제의 나를 책망하며 하는 수없이 우산이라도 펼쳐 햇빛을 막아 보았다. 이전에는 25단계 이상을 넘어본 적 없는 손풍기 강도를 시작부터 50단계로 설정했다. 그럼에도 오늘의 드레스 코드인 흰색 티셔츠에 가슴께부터 작은 투명한 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날씨에 춤을 출 수 있을까.
여름 도쿄의 온도, 습도는 전해 듣던 것 이상이었다. 어젯밤에는 길가의 물이 상점 안으로 넘칠 정도로 폭우가 쏟아지기도 했었는데, 어떻게 더 더워질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필 이런 날 릴스를 찍으러 도쿄 타워로 가고 있는 우리의 걸음은 관광을 온 사람들의 것이 아니었다. 패배를 자각한 채 전장으로 향하는 병사들 같달까. 기대보다는 체념을 짊어진 우리였다.
도쿄 타워가 한눈에 보이는 시바 공원의 풍경은 장관이었다. 하늘은 말 그대로 푸르르고, 흰 구름이 적절하게 데코레이션을 해주고 있었다. 도쿄 타워는 선명도 100 퍼센트의 모습이었고, 도쿄의 여느 관광지 같지 않게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늘도 없었다. 이런 곳에서 춤을 출 수 있을까.
"우리 진짜 딱 세 번만 찍자."
여기까지 온 이상 포기란 없다. 못 먹어도 GO라는 심정으로 딱 세 번만 찍기로 했다. 릴스를 찍을 곡은 뉴진스의 "Supernatural" 이전에 릴스를 한 번 찍었던 곡이고, 어젯밤에 대충 동선도 짜놓았으니 댄스 동호회 짬밥 좀 먹은 우리는 바로 촬영 각을 잡기 시작했다.
막내 D가 센터에서 시작하고, 중간에 동선 한 번 체인지. 도쿄 타워 릴스에 가장 진심이었던 S가 센터로 와서 마무리한다. 사실 어젯밤에는 내 센터가 없는 것이 내심 서운했으나 지금 심정은 센터고 뭐고 빨리 끝냈으면 좋겠다. 내 티셔츠의 투명한 점들이 점점 합쳐지고 있거든. 첫 번째 컷은 S의 실수로 턴을 하는 바람에 NG. 그러나 그 그림이 나쁘지 않아 S의 턴을 반영해 두 번째 컷 촬영 완료. 딱 세 번 찍기로 했으니 의무감에 마지막 컷까지 촬영 완료. 결과물은 상상 이상이었다. 춤과 동선도 생각보다 잘 맞았고, 무엇보다 이 죽이고 싶은 날씨가 영상에선 아주 사랑스럽게 나왔던 것이다. 투명하게 변해버린 티셔츠가 아깝지 않은 결과물이었다.
그렇게 땀에 절은 채로 우리는 시바공원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