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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키 Oct 25. 2024

충분히 잘하고 있다.

“그렇게 말씀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뒤에 말을 붙일 필요가 없어요.”


퍼스널 브랜딩을 위한 모임에 참여한 와중이었다. 두 번째 모임인 오늘은 나를 퍼스널 브랜딩 하고자 하는 이유를 바탕으로 골든 서클(Why->How->What)을 구상해 와 발표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삼 주 간 고민한 내용을 바탕으로 나의 골든 서클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놀러 오기로 참여한, 브랜딩 디자인을 업으로 하고 있다는 긴 파마머리의 그녀는 아까부터 사람들의 발표에 날카로운 질문을 날리고 있었다. 그것을 왜 하고 싶어 하는지 Why에 Why에 Why 꼬리를 물며 질문을 하고 있었다. 모임장도 저렇게 까지는 안 하는데 신기한 사람이다 싶은 한편 내가 발표를 할 땐 어떤 질문을 할지 걱정되던 참이었다.


“근데 그걸 왜 하고 싶으신 거예요?”

“제가 이것저것 많이 하고는 있는데 이걸 그냥 흘려버리기가 아까워서 이걸 컨텐츠로 만들고 싶어요. 제가 해보고 싶은 건 일단 해봐야 하는 성격이거든요.”

“전체를 다 보여주려고 하기보다는 좁히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제가 느끼기에는 되게 시작, 도전 이런 걸 잘하시는 분 같은데.”

“오 예전에 저를 소개할 때 시작이 쉬운 사람이라고 소개하곤 했어요. 이것저것 관심이 생기면 일단 시작은 잘하거든요. 그걸 잘 유지하지 못해서 문제지만.”

“그렇게 말씀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뒤에 말을 붙일 필요가 없어요. 이미 앞에서 딱 좋게 끝나는데.”


화법에 대한 조언까지 받은 참이었다. 사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처음 본 사람에게 화법을 지적받는다는 건, 돈 내고 컨설팅을 받지 않는 이상, 아니 어쩌면 돈 내고 받는 컨설팅에서도 기분이 나쁜 일이다. 그러나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난받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을 낮추곤 해왔으니 말이다. 학창 시절에도 여러 방면으로 다재다능한 편이었다. 공부도 곧 잘했으며, 음악 연주와 관련된 모든 동아리는 다 하며 대회를 나가곤 했다. 운동 실력도 나쁘지 않았는데, 구기 종목은 젬병이었지만 달리기나 음악 줄넘기로 대회 준비를 하기도 했었다. 다재다능하며 겸손한 성품까지 지녔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난 흔히 말하는 좀 재수가 없는 성격이었다. 잘난 척도 좀 했던 것 같고, 내가 지거나 하면 인정하기도 싫었던 것 같고. 이런 성격 덕에 오랜 시간을 은따로 살았지 싶다. 아무리 자존감이 높고, 재수가 없어도 오랜 시간을 혼자 지내게 되면 성격도 변하기 마련이다. 칭찬을 듣는 것이 어색해졌고, 항상 나를 낮추며 이야기하게 되었다. 처음 본 사람에게 지적받은 내 화법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게 아닐까, 곱씹을수록 뼈를 맞은 느낌이었다.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방금 이야기하신 거 다 보였고, 정말 많이 느셨어요!”


매주 월요일마다 참여하는 오리(IG @ori.steadystack) 쌤의 힙합 프라이빗 수업. 이번 주는 한 달 수업의 마지막 날로 각자에게 주어진 숙제가 있었다. 본인이 춤추고 싶은 음악을 선정하고, 그 음악에 맞춰 저지쇼*를 한다는 마음으로 준비해 와서 보여주는 것. 수업 중에 하는 프리스타일은 내가 음악을 잘 모르니까, 프리스타일을 잘 못하니까라는 핑계로 춤이 좀 별로여도 넘어갈 수 있었는데 준비해서 추는 춤이라니. 이것은 준비를 했느냐 안 했느냐를 넘어서 정말 본인의 춤 실력이 보이는 숙제다. 실로 난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저지쇼(Judge show) : 저지 쇼케이스의 준말. 보통 댄스 배틀에는 심사를 하는 저지가 존재한다. 배틀 프로그램 중 하나로 저지는 본인의 무대를 준비하는 데 그것을 저지쇼라고 한다.


이거 하나는 정말 잘 준비해 보자. 갑자기 의지가 솟구쳤고 나답지 않게 미리 음악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힙합 수업이니까 힙합 곡에 춤을 추는 것이 맞겠지. 지난 수업에서 오리쌤이 틀었던 노래들이 다 좋아서 해당 플레이리스트를 받아온 참이었다. 플레이리스트는 RHYTHMIX_SHUN이라는 DJ의 노래들로 채워져 있었고, 그 DJ의 다른 곡들을 들으며 어떤 춤을 출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그중 음악에 소스가 많아 이것저것 시도해 볼 수 있을 법한 Hmub라는 곡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유튜브 뮤직의 알고리즘이 재지하고 리드미컬한 곡으로, 힙합 바운스를 쓰면서 걸리시할 수도 있는 곡으로 날 인도해 잠깐 혹 해버리기도 했지만, 힙합 수업이니까 정통 힙합 스타일로 가기로 뜻을 굳혔다.


곡도 골랐으니 어떤 춤을 출지 생각해야 한다. 지난 시즌 수업에서 오리쌤의 피드백은 몸을 더 끝까지 늘려보라는 것이었다. 음악을 잘 듣고, 비트도 잘 맞추는데 몸의 흐름이 중간에 끊기는 느낌이 많아 쭉쭉 늘리는 연습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 시즌 중에 받은 피드백은 골반과 옆구리의 가동범위 더 늘리기. 보폭의 범위와 상체의 가동범위가 늘어났으니 이제 골반과 옆구리를 더 뚫어 보자는 피드백이었다. 이 두 가지 피드백을 반영해서 춤을 추면 두 달간 성장한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좋다. 기획은 충분하다. 이제 개인 연습을 해야 한다.


혼자 연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답지 않게 처음으로 개인 연습을 위해 연습실을 예약했다. 미리미리 준비하는 내가 대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우울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또 나를 덮쳤다. 아니면 전날 마신 술이 문제였을지도.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졌다. 결국 하루의 일정을 모두 임의로 취소했는데, 그중 하나가 개인 연습이었다. 연습실 당일 취소는 환불도 안 되니 애먼 돈 16,000원만 날린 셈이었다.


수업 당일 부랴부랴 음악을 반복해 들으며 어떻게 춤을 출지 구상해 보기 시작했다. 물론 머릿속으로만. 처음에는 머리만 까딱 거리다가 비트가 시작될 때 비트에 맞춰 스텝을 써야겠다. 뒤에 낮은 피리 소리가 들릴 때는 몸을 늘리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런닝맨도 멋지게 뛰어보고 골반의 움직임을 보여줘야지. 위트 있게 기침 소리가 나는 부분에서는 기침하는 척하고, 마지막엔 뒤돌아서 멋지게 끝내자.


하지만 음악만 나오면 긴장하고 흥분하는 나의 춤은 첫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머리를 까딱 거리다가 비트의 시작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히 비트 중간부터 스텝을 써서 절반의 성공. 뒤에 낮은 피리 소리에 맞춰 몸을 많이 늘리고 싶었는데 거울 속의 내 몸뚱이는 머릿속의 그것과 너무도 달랐다. 런닝맨은 스텝이 꼬여 평소처럼 방방 뛰는 스텝을 구사했고, 골반과 옆구리는 어떻게 썼는지 기억도 안 난다. 기침 소리는 놓쳐서 아무것도 못했으며 냅다 트월을 해버리며 왁킹을 선보여버렸다. 마지막엔 멋지게 끝내고 싶었으나 냅다 브이를 날리며 웃음을 선사했다.


그리고 돌아온 오리쌤의 피드백의 시간.


“몸도 많이 늘리고, 골반이랑 옆구리도 많이 써서 그동안 받았던 피드백을 잘 살려보려고 노력했는데, 잘 안된 것 같아요.”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방금 이야기하신 거 다 보였고, 정말 많이 느셨어요!

보폭도 진짜 많이 넓어지셨고, 골반 가동 범위도 좋아졌어요. 잠깐 왁킹 하셨던 부분도 그렇고 진짜 저지쇼 보는 느낌이었어요.

지난 시즌에 했던 프리스타일 영상 딱 한 번만 봐보세요. 진짜 많이 달리진 게 바로 보일 거예요.

여기에 이제 동작에 베리에이션 주는 연습을 좀 더 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선생님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냥 좋은 말만 해주시는 거 아닌가 싶다가도 항상 춤에는 진심인 분이기에, 또 하나 피드백을 주셨기에 정말 찐 칭찬인 것 같았다. 이 정도면 그냥 칭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나 자신을 낮추는 것도 속상한데, 왜 남이 해주는 칭찬까지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이젠 은따도 아니고,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좋아해 주는 친구들도 많은데. 칭찬에 있는 그대로 마음껏 좋아해도 괜찮지 않을까. 솔직히 춤 잘 췄다고 했을 때 꽤나 기뻤잖아. 오리쌤의 칭찬에 의구심을 갖는 것은 오리쌤을 무시하는 것일 수도 있어. 난 오리쌤을 좋아하니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난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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