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상태로 새해를 맞이했다. 최악이라는 건 비단 과장이 아니다. 우울증은 나날이 나를 갉아먹고 있다. 약의 강도도 병원을 찾는 빈도수도 늘어나고 있다. 통장은 마이너스를 찍은 지 오래고, 카드 빚도 생기기 시작했다. 붙을 거라 확신했던 계약직 면접은 보기 좋게 떨어졌다.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고 왔으나 이것마저 불안 불안하다. 진짜로 떨어지면 이번 달 월세는 어쩐담. 새해를 맞기 전에 치우고자 했던 7평짜리 원룸도 아직 배달 쓰레기 천지다. 정말 최악이 아닐 리 없다.
사실 새해가 오기 전 생을 마감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삼일 동안 집 밖을 나서지 못한 채 죽어야겠다는 생각만 되뇌었다. 800원짜리 번개탄 한 개를 배송비 2,500원을 추가해 구매했다. 도착 예정일은 12월 31일 내일. 오늘 배송이 되지 않는 것에 불만이 생겼지만 이 또한 나쁘지 않아 보였다. 12월 31일. 생을 마감하다.
‘12월 30일 공연 클래스 첫 수업’
캘린더의 딱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효민이 3일 동안이나 꼬셔서 등록한 오리쌤의 공연 클래스. 꼬임 당해 등록했다고 했으나 하고픈 맘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돈이 문제였을 뿐. 8번의 수업 비용과 공연장 대관비가 포함된 등록비 33만 원. 일을 하고 있을 땐 큰돈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함부로 쓸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효민에겐 물이 찬 무릎과 우울한 정신 상태를 핑계 댔지만 명백히 돈이 문제였다. 그녀의 지속적인 카톡에 무대에 서고 싶다는 내면의 마음이 홀랑 넘어가 버렸다. 재정 상태 따윈 개나 줘버리고 충동적으로 신청해 버렸다.
그 공연의 첫 연습이 오늘인 것이다. 도통 이불속에서 나갈 기운이 생기지 않았다. 내일 죽을 것인데 공연 연습이 뭣이 중하단 말인가. 그럼에도 머릿속에선 가야지, 가야지 하는 생각이 들고, 그런데 이불속의 몸은 따라 주질 않았다. 한 시간 이십 분 동안 춤을 출 수 있을까. 집중할 수 있을까. 나흘째 감지 않은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아니, 근데 오늘 춤이 내 인생 마지막 춤이라면. 갈 때 가더라도 춤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긍정이고 뭐고, 활력이 생긴 것도 아닌데 그냥 몸이 움직여졌다. 평소보다 조금 더 긴 시간 샤워를 하고, 옷 더미 속에서 연습복을 찾아 입었다.
연습실에 들어선다. 어린 학생들과 인사를 나눈다. 몇몇은 아는 얼굴이다. 춤을 춘다. 오랜만에 땀을 흘린다. 생각보다 빠른 진도에 동작만 간신히 따라갈 뿐 느낌을 전혀 살리지 못한다. 무의식적으로 되뇌인다. 어차피 공연 때까지 계속 연습하면 다 될 거야. 어라, 오늘이 마지막 춤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8주 뒤 공연까지 생각한다. 새해 첫날은 나머지 연습을 하기로 일정까지 잡는다. 나는 내일 죽을 사람인데.
딱 8주만 더 살아볼까. 일단 시작한 거 끝은 내야 하니까. 선생님과 20명의 팀원들에게 피해를 줄 순 없으니까. 이 애매한 감정을 나 또한 자세히 알지 못해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이토록 사소한 이유로 최악의 상황에서도 새해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