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까, 말까.. 해볼까.. 말까..
크루 멤버들과 직장인 퍼포먼스 이벤트를 준비 중이었다. 본인이 직장인 댄서라고 생각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다소 기준이 느슨한 이 이벤트에서 우리는 퍼포먼스 사이드에 참여했으나 사실 이벤트의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배틀 사이드였다. 그리고 그 배틀 사이드 참여를 고민하고 있는 터였다. 배틀 참가. 올 초 춤과 관련해 세운 목표들 중 하나. 사실상 이것만 도전하면 올해 춤과 관련된 목표는 모두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세 가지. 첫째, 너무 준비가 안 되어 있다. 프리스타일 연습은 안 한 지 오래고, 최근 퍼포먼스 준비를 하느라 잼*조차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준비가 완벽히 된 상황이라는 것은 오지 않겠지. 기각. 둘째, 이 배틀은 DJ가 트는 음악이 너무 별로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하우스 음악만 틀어서 힙합 댄서들에게는 쥐약이라는 이야기. 뭐 이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일단 보류. 셋째, 가장 큰 이유, 예선이 싸이퍼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한 조마다 8명의 참가자가 배치되고, 9분간 DJ가 음악을 튼다. 순서, 횟수에 상관없이 8명의 참가자가 알아서 춤을 춘다. 그중에 눈에 띄는 참가자를 저지가 선택하는 것. 아니 저지가 1분을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해 줘도 눈에 띄기 쉽지 않은데, 날 좀 봐달라고 구애까지 해야 한다니. 나같이 (술이 들어가지 않는 한) 나댈 수 없는 사람은 9분간 단 한 번의 춤도 추지 못할 수 있는, 그런 무자비한 방식. 빅 프라블럼!
* 잼(jam) : 음악에 맞춰 즉흥적으로 춤을 추며 즐기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틀 사이드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것은, 일단 새로운 에세이 소재가 필요하기도 했거니와, 혹시나 당일 나에게 댄스 신이 내려와 첫 배틀 참가에 우승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알고 보니 내가 배틀러였다는, 정말 터무니없는 상상 때문이었다. 물론 그럴 일 없다고 고개를 젓고, 친구들에겐 ‘삼만 원 내고 잼 한 번 하고 온다 생각하지 뭐’라고 이야기했지만. 되지도 않는 기대가 마음속 한켠에서 알듯 말 듯 자라나고 있었다.
와, 완전 개판이네.”
지연의 지연 끝에 예선 첫 조의 싸이퍼가 시작된 참이었다. 동시에 두 명씩 나와 춤을 출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사람들이 다 뛰쳐나와 춤을 추고 있었다. 저지의 눈에 띄기 위해 온갖 힘을 쓰고 있었다. 작년에도 배틀에 참여했던 W는 작년에는 이렇지 않았다며, 말 그대로 개판이라며 혀를 찼다. 앞에 나와 들어갈 생각 없이 계속 춤을 추는 사람, 저지의 눈에 띄기 위해 다른 사람을 가리는 사람, 욕심이 앞서 다른 사람과 부딪힐 듯 위험하게 춤추는 사람. 첫 조의 9분이 9시간 같이 느껴졌다. 스스로 앞에 나서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나로서는 보는 것만으로 모든 기가 빨려버렸고,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무질서의 백미는 MC가 “1분 남았습니다.”를 외치는 순간이었다. 8명이 모두 뛰쳐나와 말 그대로 난장판을 만들어버렸다. 첫 조가 스타트를 그렇게 끊어버려서 그런지 그 이후 모든 조가 같은 양상을 띠었다. 매너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질서의 현장이었다. 이미 질려버린 내향형 인간은 춤을 출 흥이 나지 않았다.
“H조 예선 시작하겠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H조의 차례. 내 이름이 불리고 무대 앞으로 나섰다. 너무나도 포기하고 집에 가고 싶었지만, 배틀 예선 후 진행될 퍼포먼스 사이드 때문에 발이 묶여있던 난, 그냥 딱 한 번만 추고 나오자는 생각으로 어쩔 수 없이 무대에 섰다. 그래도 이전 조들에서 힙합 음악이 꽤나 나왔으니 힙합 음악 한 번만 나와주면 여한 없이 추고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DJ는 내 편이 아니었다. 이전에는 힙합 음악을 잘만 틀더니, 갑자기 펑키한 스타일의 음악을 틀어 버린 것이다. 그냥 바로 치고 나가서 춤을 출 것인가,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는 힙합 음악을 기다릴 것인가,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런 고민을 하는 건 나뿐이 아닌 듯했다. 다들 서로 눈치만 볼 뿐 치고 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이건 또 앞 조들과 다른 양상의 것이었다. 그렇게 몇 초가 흐르고 한두 명 앞으로 나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난 어차피 한 번만 추기로 했으니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힙합 음악은 나오지 않았고, 펑키한 스타일이 반복될 뿐이었다.
같은 조에 있던 W가 치고 나갔다. 더 이상 음악이 바뀌길 기대하긴 어렵다. W의 기를 받아 그의 춤이 끝나면 치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W가 퇴장한 오른쪽으로 치고 나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뿔싸, 왼쪽에서 춤을 추던 사람도 함께 퇴장해 버렸다. 갑자기 시작된 독무대. 나는 자연스레 무대 중앙으로 이동해 춤을 췄다. 아니 그냥 발악했다. 그건 평소에 잼을 할 때만큼도 못한 무브였다. 펑키하고 빠른 템포의 음악에 다리를 떨어가며 허우적대는 수준이었다. 앞 조의 사람들을 보며 생각보다 다들 무난하네 판단했었는데, 난 무난하지조차 않았다. 그냥 못 췄다. 이 기횔 놓칠 새라 다른 사람들이 치고 나오기 시작했다. 저지들의 눈길은 내가 아닌 그 사람들을 향해 있었다. 마치 다대다 면접에서 합격자는 몰라도 내가 탈락자라는 사실은 알 수 있을 정도의 시선 차이였다. 난 그렇게 퇴장했다. 1분 남았다는 MC의 멘트에 모든 사람이 뛰쳐나가 구애를 했지만 난 그저 뒤에 멀뚱히 서서 그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결과는 역시 예선 탈락.
평소 배틀보다 퍼포먼스를 더 좋아했던 건 내가 나서서 나 좀 봐달라고 구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어서인 것 같다. 퍼포먼스는 내게 주어진 것을 열심히만 하면 내가 나 좀 봐달라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눈에 띄게 되어 있으니까. 그냥 열심히 연습하면 되니까 좋았던 게 아닐까. 하지만 배틀은, 특히나 싸이퍼 형식의 배틀은 내가 살아온 방식과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나 이거 잘한다고, 나 좀 보라고 당당할 수 있어야 하는 유형의 것. 만약 싸이퍼 형식이 아니고 내게 온전히 1분의 시간이 주어졌다면 달랐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난 올해 내가 목표한 것을 다 했고, 그 이후는 그냥 나중에 생각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