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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별꼴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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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꼴유랑단 Oct 06. 2017

스쿠터, 널 너무 쉽게 봤어

"여러분, 스쿠터가 이 정도로 위험합니다."

이천십칠년 구월 이십삼일 토요일


우리는 태국 빠이에서 약 40일가량 머물렀다. 중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멋진 정원이 있는 외곽에 숙소를 잡았고, 이곳의 이동수단은 스쿠터였다. 처음엔 겁이 나서 S593 뒤에 찰싹 붙어 앉아 달렸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직접 스쿠터를 운전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빠이는 차가 많지 않고 도로도 잘 닦여있어 초보자도 조심해서 운전하면 쉽게 스쿠터를 몰고 다닐 수 있다. 그야말로 라이딩하기 딱 좋은 동네였으니 욕심을 안 부릴 수가 없었다.


S593과 한두 번 천천히 연습하다가 나중에는 혼자서 10분 거리의 시내를 다녀올 수 만큼 능숙해졌다. 자신감이 붙었지만 결코 방심할 수 없었기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집중하며 도로를 누볐다. 혼자 운전하고 처음 갔던 곳은 요가센터. 그와 함께 가던 길을 혼자 달리니 떨리기도 하고 생각보다 중심 잡기도 쉽지 않았지만, 무사히 도착할 때마다 느낀 쾌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런 거로 쾌감을 느끼다니! 그 정도로 빠이는 조용하고 작은 시골 마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지만, 뭐라도 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곳.


앞으로도 못가고 뒤로도 못가는, 말 그대로 진퇴양난


이젠 혼자서도 운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후, 사건은 시작됐다. 그 날도 혼자 오전 요가수업을 위해 집을 나섰다. 조심조심 안전운전하며 요가센터에 도착했고 주차도 아주 예쁘게 했다. 몸도 마음도 매우 즐거워하는 그 시간을 개운하게 보낸 후, 마사지 예약을 위해 근처 마사지샵으로 이동했다. 한가한 주말 오전으로 예약을 마친 후 식사재료를 사기 위해 마트를 가려던 참이었다. 스쿠터를 이동하려는데 스쿠터가 높은 턱에 걸려 움직이질 않았다. 앞바퀴부터 넣어 주차했으니 뒷바퀴부터 굴려 스쿠터를 빼내야 하는데, 스쿠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턱이 너무 높았고 스쿠터는 무거웠으며 나는 힘이 없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오른쪽 앞에 여유 공간이 있어 앞바퀴를 먼저 빼야겠다 판단하고 스쿠터 머리를 턱이 있는 도로 쪽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한동안 스쿠터와 씨름을 이어갔는데 스쿠터는 계속 내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누가 채근하지 않는데도 초조함이 밀려왔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홀린 듯이 시동을 걸었고 스쿠터 손잡이를 살짝 돌려 앞바퀴를 도로 위에 올려놓아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엄청 잘못된 판단이었다. 생각하는 대로 손잡이를 움직이기에 나는 심각한 초보운전자였다. 결국, 살짝 돌린다는 손잡이는 매우 강한 힘을 받았다. 우당탕탕. 원하는 대로 도로 위에 올라왔지만, 옆에 주차된 오토바이 여러 대를 쓰러뜨렸고 나와 내 스쿠터 또한 도로 위를 나뒹굴었다. 스쿠터 왼쪽 사이드미러는 떨어져 버렸고 굉음을 듣고 주변에 많은 사람이 달려 나왔다. 몸집이 큰 서양 남자가 가장 먼저 달려와 괜찮냐고 물어보고 쓰러진 내 스쿠터도 일으켜주었다. 모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봤고, 나는 괜찮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손과 다리는 바들바들 떨렸고 머릿속은 하얘졌으며 S593이 너무 보고 싶었다.


그때, 누군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왔다. 내가 쓰러뜨린 스쿠터 주인이었는데, 그녀의 분홍색 스쿠터는 앞쪽이 살짝 금이 가 부서져 있었다. 머리가 노랗고 체구가 작은 그 태국 여성은 한껏 화가 난 목소리로 이거 보라며 나에게 화를 냈다. 정말 미안하다고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넸지만, 그녀는 내 사과를 듣는 둥 마는 둥 스쿠터 살피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요란스러운 그녀의 등장으로 주변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제자리를 찾았고, 그 거리 위에는 그녀와 나뿐이었다. 그녀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본인의 스쿠터는 수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도 미안하게 생각했고 필요하다면 당연히 수리비를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본인의 스쿠터만 마르고 닳도록 들여다보는 그녀가 너무 미웠다. 나는 다쳤고 도로 위에 쓰러져 있었는데 그건 그녀에게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나 보다. 얼마 후, 그녀의 남자친구가 도착했고 다친 분홍색 스쿠터를 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녀와 나도 내 스쿠터를 타고 따라갔는데 그곳은 오토바이 수리점이었다. 수리점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수리 비용은 얼마나 나올까? 왜 그렇게 힘을 세게 준걸까? 사고가 안 났다면 지금 장보고 집에 가서 S593과 꽁냥꽁냥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 그래도 사람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이 가득했다. 이윽고 그녀는 수리비가 적힌 영수증을 내밀었다. 2,000밧(한화로 약 7만 원). 2,000밧이면 내가 좋아하는 제임스네 쌀국수를 약 50그릇이나 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지금 줄 수 있냐는 그녀의 말에 나는 주섬주섬 지갑을 꺼냈다. 그래도 미리 찾아 둔 돈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그녀에게 수리비를 지급하고 한동안 멍하니 지나가는 차, 스쿠터, 사람들을 바라봤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다시 10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왜 그때 그렇게 어리석은 판단을 한 걸까?' 자책하다가도, '아니야,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위로했다. 스쿠터 수리는 10분이면 된다고 했지만 그보다 더 오래 걸렸고,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더욱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저 의자에 앉는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심정이겠지?


그러다 갑자기, 노란 머리의 태국 여성이 내 옆에 앉았다. "너 중국사람이니?" 묻기에 한국에서 왔고 남자친구와 빠이에 한 달 동안 머문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깜짝 놀라며 "한 달? 휴가가 한 달이야? 너 일은 안 해?" 하며 엄청난 질문을 쏟아냈다. 그녀는 빠이에서 태어나 자란 32살 태국 여성이었고, 현재 빠이에서 쥬얼리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자기소개를 마치고 나서는 본인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5년 전만 해도 빠이는 살기 좋은 도시였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로 좋지 않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빠질 것이다, 예전에 태국은 ‘스마일 태국’ 이었는데 본인이 생각하기에 지금은 미소를 많이 잃었다, 그 점이 매우 안타깝다, 만약 다음에 또 빠이를 방문하면 그때는 자신의 집에 머물러라, 너를 위해 쿠킹클래스도 제공할 수 있다, 등등. 처음엔 갑자기 친한 척?하는 그녀가 불편했지만, 돌이켜보면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낯설고 불안해 입술만 잘근잘근 씹다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니 '이런 상황이 당황스러워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는 게 당연할 수 있겠구나' 하며 이해가 됐다. 게다가 그녀는 "나 일 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어. 네가 내 스쿠터를 박은 두 번째 사람이야. 그때는 수리비가 3,500밧 나왔어. 여기는 내가 자주 오는 수리센터인데 좀 싸게 해 달라고 부탁해서 2,000밧에 수리한 거야"라며 나를 위로?했다. 그렇게 수리가 끝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는 다시 쥬얼리샵으로 이동했다. 헤어지며 그녀는 "너는 초보운전자니 스쿠터를 조심해서 천천히 운전해" 조언했고, 나는 미안하고 고맙다며 짧게 인사를 건넨 후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미 집에 가고도 남았을 시간이었지만 마음을 추스르고 마트에 들러 사기로 한 식료품을 샀다. 물건을 살 때까지 아무 생각도 안 났고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이제 집으로 향할 시간. 모든 게 잘 해결되었기에 아무 문제 없었지만 다 끝났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눈물이 찔끔찔끔 흘렀다. 급히 마음을 다잡고 크게 심호흡을 이어갔다. 얼마 후 숙소에 도착했는데 S593이 집 앞에 나와 있었다. 예정된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 오지 않으니 걱정된 모양이다. 애써 눈물을 꾹꾹 누르며 아무렇지 않은 듯 "오래 기다렸죠? 사고가 났었어요." 하며 급히 숙소로 들어갔다. 그는 처음에 내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너무 담담히 이야기해서 그냥 한 말인 줄 알았다고. 들어가자마자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고 올라오는 서러운 감정을 계속해서 다스리며 흐르는 눈물을 닦고 닦아냈다. 점심 준비를 마친 S593과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나는 최대한 담담하고 간단하게 상황을 전달했지만 결국 삐져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많이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며 나를 위로해 주었고, 스쿠터에 생긴 스크래치와 부서진 부분을 말끔히 고쳐주었다.


다 돌려놔 너를 만나기 전에 내 모습으로 추억으로 돌리기엔 내 상처가 너무 커


빠이 여행 말미여서 다행이었지만, 그 후로 혼자 스쿠터 타는 게 조금 두려웠다. 시간이 지난 후 더욱 깊어지는 다리 상처과 가슴 통증이 그 날을 떠올리게 해 괴로웠고, 특히 주말에 예약한 마사지샵 앞에서 벌어진 일이라 며칠 뒤 다시 가야 하는데 어쩌나 싶은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스쿠터를 다른 곳에 주차하는 건 어떨까?' 하며 머리를 굴렸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같이 가줄까?" S593이 걱정스레 물어보았다.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왜인지 혼자 이 불안을 해결하고 싶어 괜찮다고 말했다. 그렇게 얼마 뒤, 약속했던 그 날이 찾아왔다.


똑같은 길, 익숙한 도로. 달리는 내내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오늘도 똑같은 곳에 주차해야 할까? 반대편은 어떨까? 주차할 만한 다른 곳은 없을까?' 하는 사이에 도착해버린 마샤지샵.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주차할 곳을 찾아봤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지난번과 같은 자리였다. '휴우.. 그래, 똑같은 상황이지만 그때와는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보자!' 하며 일단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마사지가 시작된 후에도 한동안 무사히 집에 갈 수 있을지 걱정돼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이내 잘될 거라 주문을 외웠다. 편안하고 부드러운 마사지 시간이 끝난 후, 마사지샵을 나오니 며칠 전 내가 박은 애증의 분홍색 스쿠터가 바로 옆에 주차되어 있었다. 덜덜덜. 더욱 떨렸지만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스쿠터 구출 작전을 시작했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천천히 스쿠터를 움직였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앞머리를 돌려 앞바퀴가 먼저 도로로 나오게 할 생각이었다. 대신 시동을 걸지 않고! 조심스레 스쿠터를 움직이고 발을 힘차게 굴리니 간신히 앞바퀴가 턱을 넘었다. 아싸! 진작에 이렇게 할걸! 이제 뒷바퀴만 구출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마침 한 서양 남자가 스쿠터를 주차하러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금세 초조한 맘이 들어 힘찬 발 구르기로 뒷바퀴를 움직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사고가 난 그 날처럼 스쿠터는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남자는 혼자 낑낑대는 내가 답답해 보였는지 내가 발을 구르는 호흡에 맞춰 뒤에서 손으로 스쿠터를 밀어주었다. 데구르르, 스쿠터 뒷바퀴는 그렇게 도로 위로 빠져나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진심으로 그 남자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한 달이 지난 지금 생각해봐도 심장이 벌렁거린다. 여행 중 타지에서 발생한 일이니 더더욱 몸도 마음도 힘든 시간이었다. 스쿠터 사고로 스쿠터 운전이 무서워진 건 아니다. 단지 사고가 난 장소에 가는 게 두렵고 겁이 났을 뿐. 하지만 그마저도 같은 상황을 반복함으로 지혜롭게 극복했으니 나름 대성공이었다.

빠이에서 스쿠터는 필수불가결한 이동수단이다. 그렇기에 많은 여행자가 스쿠터를 대여하는데, 사고를 경험한 당사자로서 진정 조심하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방심하고 속도를 조금 올렸다 미끄러지기도 하고, 심심치 않게 충돌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심하게 다쳐 팔이나 다리에 깁스한 여행자도 더러 있고, 스쿠터가 망가지면 수리비용도 만만치 않기에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물론 스쿠터 사고라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하나 건졌지만 살면서 다시는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


안전운전! Yes I Can!


by J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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