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국수 한 그릇 하실래요?
이천십팔년 삼월 이십일일 수요일
의외로?! 먹는 게 까다롭다. 미식가라서! 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그건 아니고, 몸이 비실대기 때문이다. 어쩜 그렇게 위와 장은 운동을 안 하는지. 돌도 씹어 먹을 나이에는 아무거나 주워 먹다가 많이 아팠다. 된통 당하고 나니 이러면 안 되겠구나, 싶어 좋아하지만 먹지 못하는 음식은 자제하는 절제력을 기르게 되었다. 물론 '못' 먹는 음식만큼 '안' 먹는 음식도 적지 않지만, 흐흐흐
한국에서도 이렇게 가려 먹어야 하는 탓에, 여행지가 유럽권이었다면 아마 빵이나 파스타 같은 밀가루 음식이 많아 고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이번 여행은 우리가, 아니 내가 사랑하는 쌀밥을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는 인도, 태국이었다. 야호! 신난다! 물론 쌀밥만으론 만성 변비를 물리칠 수 없었지만, 소화가 안 돼서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던 중 오랜 시간을 보낸 태국에서 내 영혼의 단짝, 소울푸드를 만났다.
바로 쌀국수!!
쌀국수의 면은 소화가 잘 돼 속이 부대끼는 일이 없다. 음식점마다 현지식 향신료를 사용해 개성 넘치는 국물을 만들어낸다. ‘건더기 파’인 내가 국물로 배를 빵빵하게 채울 정도로 쌀국수는 각양각색의 매력을 자랑한다. 물론, 국수의 종류가 여러 가지라 쌀로 만든 면인지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찐한 국물과 푸짐한 면은 쌀국수의 매력에 빠지기 충분했고, 나는 기어이 태국 쌀국수 정복을 꿈꾸게 됐다.
여행 중 가장 사랑한 쌀국수 가게는 빠이의 제임스네. 빠이는 태국 치앙마이에서 가까운 작은 동네로, 우리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곳이다. 아직도 숙소 앞 정원의 풀벌레 소리와 가로등 하나 없는 캄캄한 도로 위에 밝게 빛나는 별들이 눈앞에 생생하다. 이곳에서 한 달을 머물며 구석구석 돌아다녔고, 동네 맛집을 섭렵했다. 우선 블로그나 트립어드바이저에 소개된 음식점을 여럿 돌아다녔는데 나쁘진 않았으나 썩 훌륭하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빠이 여행 중 제임스네 쌀국수가 제일 맛있었다는, 성의 없지만?! 눈에 띄는 후기를 발견했고 부푼 기대와 설렘을 안고 식당으로 달려갔다.
제임스네는 동네 사람들에게 인기 만점인 로컬 식당이었다. 저녁 장사만 했고, 오픈 시간은 대략 6시 30분에서 7시 사이. 얼핏 보면 여기가 맛집?!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허름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편견을 깨부수듯 오픈 시간만 되면 음식을 먹기 위해 많은 사람이 기다렸다. 우리도 그들과 함께 주변을 서성이다 영업개시를 알리면 재빠르게 자리를 잡고 메뉴를 확인했다. 우리처럼 간혹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위해 메뉴를 A4용지에 영어로 적어 두었는데 단순한 메뉴 구성이 매우 맘에 들었다. 보통 이쪽 식당은 우리나라 김밥천국을 방불케 하는 어마어마한 종류의 메뉴를 선보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제임스네는 쌀국수와 밥, 이 두 가지로 선택과 집중! 음식의 질을 한껏 끌어올렸다. 남자 사장님은 국수 만드셨고, 여자 사장님은 밥 메뉴를 맡으셨다. 그리고 서빙 및 뒷정리는 두 분의 귀여운 아이들이 해 주었다.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막내도 몇 번 만날 수 있었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아빠는 아이에게 엄청 자상한 태도로 대해주었고,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오빠도 막냇동생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보기만 해도 미소가 절로 나오는, 이런 훈훈한 가족이라니! 음식을 먹으러 왔다가 사랑 가득한 현지 가족의 모습을 만난 건 뜻밖의 수확이었다.
가게 이름은 태국어로만 쓰여 있었는데, 와이파이 이름이 영어 제임스여서 우리는 제임스네라는 별칭을 지어주었다. 치킨, 포크 쌀국수는 35바트(약 1,200원), 비프, 에브리띵 쌀국수는 40바트(약 1,380원), 치킨 라이스는 35-40바트. 착한 가격에 한 번 반했는데 푸짐한 양에 두 번 반하고 말았다. 가게 오픈을 알리면 남자 사장님께 직접 주문 메뉴를 말씀드리고 자리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나름 오픈 키친?!이라 음식 만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면을 삶는 모습, 뜨거운 치킨을 노련하게 써는 모습을 보는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갈 때마다 포장하는 사람도, 앉아 기다리는 사람도 참 많았다. 어쩜 이리 한결같이 인기가 많은지! 하지만 사장님 부부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차분하게 음식을 만들었다. 주변 상황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주문한 메뉴가 테이블 위에 도착했다. 합장으로 음식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국물을 한 번 떠먹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이 쌀국수를 사랑하게 되리란 걸! 제임스네 쌀국수는 내 인생 쌀국수가 틀림없다는 걸!!
우리는 센야이(넓은 면)로 먹는 걸 좋아했다. 센야이는 센렉(중간 면), 센미(얇은 면) 보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부드러움이 있다. 그게 넓은 면으로 만든 팟씨유를 선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제임스네 방문해 쌀국수를 주문할 때도 넓은 면으로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넓은 면 쌀국수는 얇은 면 쌀국수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으니 안 먹어 본 사람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매번 '센야이로 바꿔주세요' 말하는 동양 애들이 저녁마다 찾아오니 어느 순간 사장님의 눈빛에서 '너희 또 왔어?' 하며 알아봐 주는 게 느껴졌다. 어찌나 고맙던지!
한국에서 집 근처 태국 현지인이 운영하는 쌀국수 가게에 갔을 때, 이국적이고 색다른 맛에 반했다. 달짝지근하면서 쌍화탕 같기도 한 깊은 맛. 근데 바로 그 맛을 현지에서 직접 느끼게 된 것이다. 자극적이거나 느끼하지 않으면서 속을 편하게 해 주는 시원한 국물. 한국에서 먹은 쌀국수와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치킨 쌀국수에는 보통 치킨을 먹기 좋게 잘라서 듬뿍 얹어 주셨는데, 어느 날은 귀하다는 선지도 몇 조각 넣어주었다. 이런 게 바로 외국인 단골손님이 받는 특혜로구나! 얼쑤! (나만의 착각은 아니겠지, 흐흐) 국물을 호로록 마시면서 웃음이 절로 났다. 기분이 날아갈 듯 신났고 매일매일 먹으라고 해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우리는 야시장에서 저녁을 해결하지 않을 땐 자주 제임스네를 방문했다. 그리고 나는 항상 똑같은 메뉴인 치킨 쌀국수를 먹었다. 매번 먹을 때마다 맛이 달라지는 재미난 경험을 하기도 했고, 똑같은 걸 계속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아, 어떻게 하지? 이 맛이 너무 그리울 것 같아ㅠ 쌀국수 만드는 법 배워가야 하나ㅠ
빠이를 떠나는 마지막 날, 다른 무엇보다 제임스네 쌀국수를 더는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아쉬웠다. 한국에 가서도 생각날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쑥스럽지만 인사를 건네야겠다, 다짐하고 식사를 마친 후 남자 사장님께 다가갔다. 당신의 음식, 정말 맛있다고! 우리는 내일 떠나지만 다음에 또 오겠다고! 고맙다고 수줍게 마음을 전했다. 비록 언어가 다르기에 감동으로 물결치는 이 감정이 100% 전달되진 않았겠지만, 아마 우리가 당신의 국수를 엄청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까지 인정한, 자타공인 빠이 맛집이니까!
보통 식당에 가면 주문한 음식만 먹고 잘 먹었다! 하며 나오기 일쑤인데 이곳에서의 느낌은 좀 달랐다. 심지어 그 어떤 사적인 대화도 나누지 못했는데(그럴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바쁘셨다). 어느 여행책에도 나오지 않는, 마치 숨은 보석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동네 식당에 온 것 같은 편안함, 우리를 반겨주는 눈빛, 쌀국수에 선지를 동동 띄워주는 친절함까지. 화려하진 않지만 그래서 매력적인 쌀국수 한 그릇. 그 한 그릇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을 여행 중에 만나 본 적 있는 사람은 엄청난 행운을 만난 것이다. 나처럼 영혼의 단짝을 만난 이가 있다면 있는 힘껏 축하하고 싶다. 아마 그 단짝은 주기적으로 당신을 그곳으로 부를 것이다. 어서 오라고, 와서 나를 음미하며 맛있게 먹으라고! 그렇게 빠이가, 제임스네 쌀국수가 나를 부르고 있다. 속으로 되뇐다. 가야지, 가야지. 늦지 않게 꼭 가야지. 당신의 국수가 정말 그리웠다고, 그래서 또 왔다고 말해야지. 아, 쌀국수가 생각나는 새벽이다.
by J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