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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꼴유랑단 Feb 21. 2018

우리가 사랑하는, 결점 가득한 여행

나만의 여행을 직조해요! (feat. 모든 요일의 여행)

이천십팔년 이월 구일 금요일


책 안에 가지런히 정리되는 여행 같은 건 없다.

여행은 언제나 구멍 난 양말 같고, 단숨에 들이켜는 커피 같고, 마른 빵 쪼가리 같았다가, 하얀 식탁보 위의 식사 같고,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오는 샴페인 같았다가도 순식간에 구정물로 변해버린다.

그리하여 평생 결코 모를 어떤 것에 대해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여행을 말할 것이다.

여행이야말로 나는 진짜 모르겠다고. 모르니까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끝까지 해보겠다고.

- 김민철, <모든 요일의 여행>, 북라이프, 2016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온 첫 배낭여행 in 캄보디아 뱅밀리아 사원


나의 첫 해외여행은 2014년 11월. 진짜 여행을 하려면 최소 한 달은 갔다 와야 한다는 조언을 들은 후 바리바리 배낭을 싸고 캄보디아로 향했다. 겁쟁이 쫄보, 초보 여행자 주제에 첫 해외여행을 완벽하고 성공적으로 마치고 싶어 한없이 욕심을 부렸다. 아침부터 일어나 저녁까지 바쁘게 돌아다녔고 여행은 으레 그렇게 하는 건 줄 알았다. 일주일이 지났을까, 다행히 한인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내 욕심을 간파하고 이렇게 말해주었다.


“시간도 많은데 왜 그렇게 조급하니?

  여유를 가져봐, 시간에 쫓기지 말고.”


나는 예민하고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라 뭐든 계획적으로 빈틈없이 잘 해내야 했다. 게다가 주어진 시간을 조금도 남김없이 알차게 차곡차곡 채워야 안도하는 강박까지 가지고 있었다. 생각대로 계획대로 하루가 흘러가야 했고,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 무척 속상하고 힘들어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는 시간을 알뜰하게 사용하는 게 아니었다. 시간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사장님의 조언 후, 시간에 갇혀 있는 나를 꺼내 주기로 했다. 어떤 날엔 종일 숙소에 머물며 여행자들과 대화를 나눴고, 비 오는 날엔 숙소 마당에 앉아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여유를 누렸다. 선크림도 제대로 바르지 않은 채 시내를 누볐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걷고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공유했다. 그렇게 한껏 자유로운 나를 찾은 덕분에 계획했던 한 달을 조금 넘긴 50여 일 동안 여행하다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2017년 5월, S593과 함께 중장기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혼자 여행했을 때보다 기간도 더 길고 여유롭게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믿음직스러운 S593과 함께였기에 두려울 것도, 조급한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했던가. 나는 3년 전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모든 시간의 조각들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길 바랐고, 생각대로 시간을 채울 수 없을 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예상보다 더운 방콕 날씨에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났다. 판공초로 가는 지프 안에서 멀미하느라 창밖 풍경을 즐기지 못하는 내가 미웠다.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뒤엉켜 정신없는 하노이의 교통상황에 인상을 찌푸렸다.


기차티켓을 예매하기 위해 2-3시간을 앉아 기다렸다, 아이고 궁뎅이야


여행 초반 일이다.

태국에서 인도로 넘어간 우리. 콜카타에서 다질링 가는 기차를 예매하기 위해 무겁게 챙겨 온 인도 가이드북을 펼쳤다. 콜카타 숙소에서는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없었고, 오로지 가이드북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기차 예매 방법과 장소가 자세히 나와 있었기에 태국에서 미리 검색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우리 고생의 시작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른 아침, 환전을 해야 했는데 환전소가 아직 문을 열지 않아 근처 식당을 찾았다. 사실 이 식당을 찾은 주목적은 와이파이. 와이파이가 아주 잘 된다는 가이드북의 가르침을 따라간 것이다. 하지만 식당 사장님은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알지 못한다며 우리의 간절함을 외면했다. 아쉬운 마음에 불쌍한 눈빛을 날렸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인터넷의 은총을 받지 못하고 식당을 나섰다. 마침 환전소가 문을 열었고, 몇 군데 비교 끝에 환율이 더 나은 곳을 선택했다. 하지만 여기서 두 번째 고생이 시작됐다. 가이드북에서는 콜카타 기차 예매 시 환전영수증이 필요하니 반드시 챙기라고 당부했다. 환전소 직원에게 환전영수증을 언급하자, 환전영수증 수령 시 환율을 높게 쳐 줄 수 없다며 처음 제시한 것보다 훨씬 낮은 금액을 제시했다. 살짝 고민이 됐지만 '기차 예매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생각하며 약간 손해를 보고 환전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 채 환전을 마친 후 기차표 예매를 위해 예매 사무소로 향했는데, 이것 또한 만만치 않았다. 물어물어 간신히 버스를 탔고 하차 후에도 하염없이 걷고 걸었다. 햇볕은 뜨거웠고 땀이 났고 다리가 아팠다.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각종 관공서가 모여있는 지역이라 비슷하게 생긴 네모난 건물들만 빽빽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슬슬 짜증이 날 그 무렵, 우여곡절 끝에 기차 예매 사무소에 도착했다! 이것 또한 가이드북에 나오는 위치와는 살짝 달랐지만 어쨌든 찾았으니 그걸로 다행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세상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외국인 예매창구에는 내국인 창구보다 사람이 훨씬 많았다. 데스크에서 서류를 전달받고 근무 경찰에게 이곳이 외국인 예매창구가 맞는지 재차 확인했다. 지켜보니 단체관광객의 티켓을 대신 예매해 주는 현지인들이 꽤 있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여행사 직원들인 셈이다. 우리는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기차 좌석이 남아 있는지 간절히 확인하고 싶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와이파이를 찾았으나 헛수고. 결국 가방에 있던 신문지를 깔고 앉아 순서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우리 번호는 42번. 두세 시간을 앉아 있으니 엉덩이가 시리고 아팠다. 하지만 천장에 돌아가는 팬 덕분에 실외만큼 덥지 않아 그걸 위안으로 삼았다. 부디 내일 출발하는 기차에 자리가 있기를 빌던 간절한 마음도 점점 사그라들었다. 모든 단계를 다 건너뛰고 하루빨리 다질링으로 가고 싶었다. 긴긴 기다림으로 지칠 무렵,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됐다. 친절한 인도 아저씨는 우리의 서류를 보더니 원하는 일등석은 없지만 이등석에 자리가 있다고 했다. 아싸! 빨리 여길 뜨자! 우리는 안도의 함박웃음을 보였고 아저씨도 함께 좋아해 줬다.


기차 예매를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우리에겐 쓰린 상처가 남았다. 바로 환전영수증! 환율까지 손해 보며 환전영수증을 받아왔건만, 기차 예매 시 환전영수증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가이드북 저자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왜 우리에게 잘못된 정보를 알려준 거야! 왜 가이드 북을 제대로 수정하지 않은 거야!


생각대로 펼쳐지지 않은 하늘 빛깔에 점점 매료됐다


미구엘의 그 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못 봤다고 큰일 나는 게 아니야, 이건 세계 최고의 불꽃놀이가 아니야. 거길 못 갔다고 큰일 나는 게 아니야, 이 도시엔 거기만 있는 게 아니야. 그거 못 먹었다고 여행이 끝장나는 게 아니야, 정작 현지인들은 그거 먹지도 않잖아. 그걸 사러 여기까지 온 게 아니잖아, 왜 그렇게 까지 필사적인 거야, 넌 너만의 여행을 직조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잖아.

- 김민철, <모든 요일의 여행>, 북라이프, 2016



태국 빠이에서 한 달 머물며 김민철 님의 책 <모든 요일의 여행>을 읽었다. 마음에 콕콕 박히는 문장이 너무 많아 읽고 또 읽으며 나를 돌아봤다. 주름 없는 여행은 없다. 내 맘대로 되는 여행도 없다. 완벽한 여행이란 있을 수 없다. 어디 내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산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는가? 행여 그렇다 한들 그 인생이, 그 여행이 행복하고 즐겁겠는가? 그런데 나는 은연중 내 여행이 비단결 같길, 계획대로 이루어지길 바랐다.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내 생각 주머니들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허무맹랑한 꿈이라는 걸 인정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밤사이 쏟아진 비로 빨래가 흠뻑 젖었지만 키득키득 웃을 수 있었고, 남들이 꼭 가봐야 한다고 입을 모아 얘기하는 관광지에 가지 않아도 좋았다. 힘들게 찾아간 식당이 문을 닫고, 설거지하다 컵을 깨고, 버스사고로 유리 조각에 베이고, 탈이 나서 화장실을 수십 번 왔다 갔다 했지만 괜찮았다. 그게 뭐 어때서? 덕분에 엄청난 이야기보따리를 얻게 됐는걸!


물론 완벽하게 다 내려놓진 못했다. 가끔 무리해서라도 이동하고 싶고, 미리 알아보지 못한 게 후회되고, 이렇게까지 고생해야 하나 한숨이 절로 났다. 하지만 ‘이건 여행이잖아!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하며 위기의 순간들을 넘겼다. 하루하루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도 비슷한 일을 자주 만난다. 눈앞에서 버스를 놓치고, 퇴근 후 찾은 단골 카페는 임시휴무고, 황금 같은 휴일에 갑자기 아파 약속을 취소하고. 수많은 일상 속 순간들이 이런 결점의 연속인데 하물며 여행 중이라고 해서 모든 게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되겠는가? 


아이스크림 먹으려고 힘들게 찾아갔는데 폐업ㅠ 이런게 여행이구나ㅠ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 그가 말했어요. 하지만 완벽한 건 그다지 매력이 없잖아 우리가 사랑하는 건 결점들이지.

-존 버거, <A가 X에게>, 열화당, 2009



지나친 욕심과 쓸데없는 기대, 여행의 환상에 사로잡혀있던 나는 여행을 하며 그 모든 걸 하나씩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찾아온 우연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했다. 안 가본 골목을 걸으며 새로운 상점들과 눈인사를 했다. 리뷰가 없는 식당을 찾아 마음에 드는 메뉴를 골라 먹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숙소 예약 없이 무작정 다른 도시로 떠나 우여곡절 끝에 전망이 훌륭한 방을 찾았다. 선택이 항상 만족스럽진 않겠지. 어쩌면 아쉬움에 한숨 쉬고, 지루함에 몸을 배배 꼬고, 기대에 못 미쳐 실망하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돌아보면 이런 수많은 선택과 우연들이 모여 여행을 알록달록 예쁜 빛깔로 물들였음을 알게 됐다. 내 여행의 내 선택은 모두 옳았음을 깨달으니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나의 선택을, 그에 따른 결과와 수많은 결점을 사랑하기로 하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여행의 해답을 깨달은 듯, 설레는 마음으로 또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다. 이전보다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호언장담 해도 분명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겠지. 하지만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결점 가득한 여행을 하다 보면, 나만의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방법을 하나씩 배워가게 될 것이다. 10년, 20년 혹은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렇기에 언제 떠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내 일상이 만들어질 것이다. 다양한 시간 조각과 일상 속 소소한 순간이 퍼즐 조각처럼 하나둘 맞춰져 나만의 여행지도가 완성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또 떠나고 싶다.

내가 선택한 그곳으로, 내 결점을 환영해 줄 그곳으로.

여행은 한 치의 오류도 없이 목적지 앞에 세워주는 관광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시작되는 게 아니다. 실수로 이상한 버스에 올라탄 순간, 그 이상한 버스를 나도 모르게 선택해버린 순간, 나만의 여행은 직조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 김민철, <모든 요일의 여행>, 북라이프, 2016



by J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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