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속의 문
어둠 속에서 태오가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의 방, 침대 위에 반듯이 누워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온몸이 뻐근해서 뒤척여 보려 했지만,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꼼짝할 수 없었다. 실로 오랜만에 겪는 상태, 가위였다. 사춘기 때 곧잘 가위에 눌렸다. 남들처럼 귀신이 나온 적은 없었고, 그저 침대에 누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게 전부였다. 몽롱했던 기운이 덕분에 날아갔다.
그리고 드문드문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던 자신에게 끊임없이 시비를 걸던 선배. 그 후 난데없이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그림자의 주인은 윤지웅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잔뜩 화가 난 지웅이 선배의 멱살을 잡았고, 술집은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태오는 그가 화내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아니,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지웅이 화를 내는 모습은 주변 공기를 바꿔버릴 만큼 위압적이었다. 평소라면 바로 꼬리를 내렸을 선배도 술에 취했는지 겁도 없이 계속 떠들어댔다. 그 모습에 지웅이 주먹을 들었고, 그를 말리려다 태오는 우람한 팔꿈치에 턱을 맞고 말았다.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오게 됐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여전히 가위에 눌려 있는 상태였고, 좀 전보다 심해진 압박감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움직이려 애썼지만, 오랜만에 걸린 가위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안태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거야?!’
순간 묵직한 지웅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한순간에 정신이 돌아왔다. 선배랑 실랑이를 벌이는 중에도 지웅은 자신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불러댔다. 마치 제 일인 양 분노하던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별… 이상한 놈 같으니라고.’
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어슴푸레한 빛이 거울 속의 누군가를 비춘다. 품이 맞지 않는 교복을 입은 소년은 왜소했다. 무언가에 짓눌려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웅은 여느 때와 같이 꽃무늬 앞치마 차림으로 가게를 정리하고 있다. 구름이 껴서 흐린 밤, 창문 너머로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계절은 어느새 여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손님이 없는 가게는 어쩐지 평소보다 적막했다. 심향 어디에서도 도현을 볼 수 없었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며칠 전 도현이 사정이 있어 일주일 정도 가게 문을 닫는다고 했다. 알겠다고 대답하려다 문득 마음이 바뀌었다. 지웅은 일주일 정도라면 혼자서 가게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도현이 단칼에 거절했지만, 지웅은 포기하지 않고 귀찮게 굴었다. 결국 도현은 허락했다. 어차피 할 일이라고는 물건을 들이고 정리하고 청소하는 단순한 작업밖에 없었고, 그 대부분의 일은 지웅이 맡아서 해오고 있던 것이었다. 별다른 일없이 이틀이 흘렀고, 오늘도 마감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딸랑-
“어서 오세요. 당신의 향기를 찾아드리는 가게, 심향입니다.”
“윤지웅?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계산대 안쪽 선반을 정리하던 지웅은 인사말 보다 늦게 돌아섰다. 그곳에는 태오가 서 있었다.
“어라? 안태오?”
가게가 학교 근처에 있긴 했지만, 아는 사람을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무엇보다도 엉망진창이 된 그날 이후 둘은 마주친 적이 없었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고, 지웅이 먼저 입을 뗐다.
“얼굴 보는 거 오랜만이다. 잘살았어?”
“오랜만이고 뭐고,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니까.”
“뭐하긴 보시다시피 알바하고 있잖아. 이 몸이 좀 바쁘시다.”
“그래서 학과 생활이고 동아리고 죄다 내버려 두고, 여기와 계시는 거였다?”
“으음…. 그래, 그래. 복잡한 사정이 있는데 말하긴 어려워. 그냥 좀 넘어가주라.”
지웅은 주 무기인 넉살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날 이후 태오는 지웅을 피하고 있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를 집으로 데려다준 사람이 지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만나고 싶지 않았다. 복잡한 마음에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꺼려졌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맞닥뜨리고 말았다. 그가 학교생활보다 중요하다고 했던 일의 정체는 아르바이트였다.
“그래서 여기는 어쩐 일이야?”
“아… 그래. 이거 혹시 여기 있는 거 맞아?”
그를 바라보던 태오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연한 갈색빛이 도는 상자가 사진 속에 담겨 있었다.
“응. 여기 서 파는 인센스 스틱이야.”
“그럼 그거 하나 챙겨주라.”
“네가 쓰려고?”
“아니, 심부름. 누나가 좀 사달라더라고.”
“너 누나가 있었구나? 근데 이 제품이 재고가… 아, 오늘 들어왔네. 잠시만.”
지웅은 주방 뒤쪽에 창고로 들어갔다. 덩그러니 혼자 남은 태오는 가게를 둘러봤다. 선반에는 사진에서 본 것과 비슷한 상자들이 선반에 놓여있었다. 상자 앞에 아기자기한 안내 문구가 적혀 있었고, ‘알바생’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하얀 가게 안에 꽃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윤지웅… 학교에서 보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됐어. 의미 없는 생각은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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